[include(틀:역대 하스몬 왕조 국왕)] [include(틀:역대 이스라엘 대제사장)] ||<-3><#FFFFF0> '''{{{#000000 하스몬 왕조 10대 군주}}}''' [br] {{{+2 {{{#000000 '''Ἀριστόβουλος | 아리스토불로스 2세'''}}}}}}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리스토불로스 2세.png|width=100%]]}}} || ||<|3><#FFFFF0> '''{{{#000000 제호}}}''' ||<#FFFFF0> '''[[한국어|{{{#000000 한국어}}}]]''' ||아리스토불로스 2세 || ||<#FFFFF0> '''[[그리스어|{{{#000000 그리스어}}}]]''' ||Ἀριστόβουλος || ||<#FFFFF0> '''[[라틴어|{{{#000000 라틴어}}}]]''' ||Aristobulus II || ||<-2><#FFFFF0> '''{{{#000000 존호}}}''' ||코헨(כֹּהֵן , 제사장)이자 국왕 || ||<-2><#FFFFF0> '''{{{#000000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49년 || ||<-2><#FFFFF0> '''{{{#000000 재위 기간}}}''' ||기원전 66년 ~ 기원전 6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하스몬 왕조]] 10대 군주. == 행적 == 하스몬 왕조 7대 군주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와 8대 군주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차남이다. 그는 어머니의 치세 때 유대 장군을 맡았고, 다마스쿠스 공략전에 투입되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견한 이집트군에 격퇴되었다. 기원전 67년 살로메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형 [[요한 히르카노스 2세]]가 [[대제사장]]으로서 차기 권력을 쥐는 게 예정된 반면에 자신은 일개 장군 노릇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밤에 예루살렘을 몰래 빠져나왔다. 이후 [[사두가이파]]를 포섭해 2주 동안 22개의 요새를 공략해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기원전 66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유대 왕위에 오른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여리고]] 인근에서 반란군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 많은 병사들이 적에게 귀순하는 바람에 패배하고 예루살렘 성채로 피신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확보하고 압박을 가했고,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신변을 보장받고 대제사장 직위를 유지하는 대신 통치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렇게 합의가 이뤄졌지만,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아리스토불로스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안티파트로스의 참언에 귀를 기울였고, 결국 안티파트로스의 조언에 따라 나바테아인의 왕 아레타스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아레타스 3세]]는 이 기회에 유대 왕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65년 5만 대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몇 달간 포위 공격했다. 한편, [[로마 공화국]]의 [[명장]] [[폼페이우스]]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한 뒤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이때 그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의 사절들이 폼페이우스에게 찾아갔다.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로스로부터 400달란트를 제공할 테니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아레타스 3세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아레타스 3세는 강대한 로마와 싸우길 원치 않았기에 순순히 철수했다. 하지만 요한 히르카노스 2세의 사절들은 폼페이우스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며 유대의 왕으로서 복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한편, 하스몬 왕조의 내우외환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던 유대인들은 폼페이우스를 찾아가서 하스몬 왕조를 아예 멸망시켜달라고 청원했다. 폼페이우스는 양자의 갈등을 중재하겠다는 명분으로 기원전 63년 유대로 진군해 여러 도시에 무혈 입성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가 유대 왕국을 로마의 속주로 송두리째 삼으려 든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저항하려 했지만, 곧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예루살렘을 로마군에 넘겨주기로 했다. 유대인들이 이에 불복하여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않자, 폼페이우스는 유대인들이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식일]]에 급습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12,000명을 학살했다. 그 후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로마로 끌려갔고,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대제사장으로 공인되었지만 정치적 권위는 없었다. 기원전 56년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유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마군에 도로 붙잡혀 다시 로마로 끌려갔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해방된 뒤 폼페이우스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로 파견된 2개 군단에 가담했지만, 이동 중에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에게 독살당했다. 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는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때 [[파르티아]]의 편에 서서 유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했지만, 기원전 37년 로마군과 연합한 [[헤로데 대왕]]에게 패배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분류:하스몬 왕조 국왕]][[분류:기원전 49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