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아르노 드 세르볼[br]Arnaud de Cervole || ||<-2> '''생몰년도''' ||<(> [[1320년]]경 ~ [[1366년]] [[5월 25일]] || ||<-2>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페리고르 로에가론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빌프랑슈 인근 글레이제 || ||<-2> '''직위''' ||<(> 프랑스 용병대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의 [[부르주아]], 용병대장.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 == 생애 == 1320년경 프랑스 왕국 페리고르의 로에가론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교회에 들어갔고, 페리고르 교구에서 대제사장이 된 뒤 도르도뉴의 벨린 교회 영지를 소유했다. 이 이력으로 인해, 그는 '벨린의 대제사장(Archiprêtre de Veline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곧 [[성직자]]가 되기를 관두고 [[용병]]으로서 백년전쟁에 참여했고, 1347년 보르도 대주교로부터 대제사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1351년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심복인 [[샤를 드 라 세르다]]에게 고용되어 80명의 부대를 지휘할 권한을 부여받고 페리고르에서 잉글랜드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후 몽카레, 베르주라크, 플릭스 및 기트르 성을 보수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장 2세로부터 200리브르의 연간 수입을 얻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약탈을 종종 일삼았기에, 프랑스 민중으로부터 도적이라는 비방을 받았다. 1354년 1월 8일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카를로스 2세(나바라 왕국)|카를로스 2세]]에게 피살당한 뒤 프랑스 왕실이 자신에게 보내던 연간 수입이 끊어지자, 그는 부하들을 선동해 앙굴렘에 있는 3개의 성을 점령했다. 이후 [[브레퇴유 공방전]]에서 장 2세에게 재기용되었고, 본대가 브레퇴유를 포위하는 동안 자신은 부하들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여러 마을을 심하게 약탈했다. 나중에 이 일로 기소되었지만, 장 2세는 반역자 카를로스 2세 일당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사면하고 샤토뇌프의 영주권을 양도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소속되어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이후 회복되어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그는 르브루 영주 앙드레 드 샤토루-쇼비니의 미망인으로서 프랑스 중부에서 여러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미망인 잔 드 그라세이와 결혼했다. 그 결과 르브루의 영주이자 그라세이 남작이 되었고, 장 2세의 셋째 아들인 장 드 베리로부터 콩크리슈를 양도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중단되었고, 프랑스 왕국은 용병대에 대한 급료 지급을 중단했다. 이에 용병대는 프랑스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아르노는 1357년경 다른 자유 용병대가 결합된 대 용병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총 2,7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지휘해 프로방스를 심하게 약탈한 뒤 [[교황청]]의 본거지인 [[아비뇽]]으로 쳐들어가 포위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6세]]로부터 금 20,000 플로린을 받아낸 뒤 부하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1358년 4월에 [[마르세유]]를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의 인구가 너무 많고 방어가 잘 되어 있어서 공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이후 느베르의 성주로서 [[샤를 5세|샤를 왕자]]에게 고용되어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난]] 토벌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중 말리코른 성이 잉글랜드 용병대장 [[로버트 놀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방향을 돌려 그곳을 되찾기로 했다. 주변 마을 주민들이 아르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놀스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퇴했다. 결국 아르노는 말리코른 성 탈환을 포기하고 파리로 북상해 샤를 왕자가 파리를 되찾는 데 일조했다. 1362년 프랑스 시골 지역을 심하게 약탈하고 있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1362년 4월 6일 [[브리네 전투]]에서 [[장 2세 드 멜룬]], [[자크 1세 드 부르봉]]의 지휘를 받으며 자유 용병대와 교전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하지만 자유 용병대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곧 해산되었고,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부하들을 이끌고 부르고뉴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다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필리프에 의해 고용되었다. 용담공 필리프는 마침 아내를 잃어 홀아비였던 그에게 샤토빌랭과 아르크앙바로아의 영주인 장 3세 드 샤토빌랭의 딸인 잔 드 샤토빌랭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는 1363년에 아들 필리프를 낳았고, 용담공 필리프가 아기 필리프의 [[대부]]가 되어줬다. 1364년 5월 16일, 아르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고용되어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대적했지만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곧 철수했다. 샤를 5세가 자신의 정적인 카를로스 2세를 도운 것에 분노하자, 용담공 필리프는 프랑스 왕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갖가지 조치를 내려야 했다. 1365년, 용담공 필리프는 아르노를 프랑스 바깥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헝가리에서 튀르크족에게 대항하는 [[십자군]]에 가담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용병대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도중에 로렌, 보주 등 라인강 유역 도시들을 황폐화시켰고, 스트라스부르에 그대로 머물렀다. 1366년 초, 그는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조직한 십자군에 참여하러 길을 떠났다. 그러나 1366년 6월 25일 솜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다가 빌프랑슈 인근의 글레이제에서 어느 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살해되었다. 그는 생전에 잔 드 그라세이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고, 잔 드 샤토빌랭과의 사이에서 아들 필리프와 딸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아들 필리프는 비트르의 세네샬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 되었고, 마르그리트는 기사 자크 드 댕트빌의 부인이 되었다. [[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1320년 출생]][[분류:136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