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스웨덴 국왕)]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60a42 0%, #a80d53 20%, #a80d53 80%, #860a42)"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초대 국왕[br]{{{+1 아돌프 프레드리크}}}[br]Adolf Fredrik'''}}}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ustaf_Lundberg_-_Portrait_of_Adolf_Frederick%2C_King_of_Sweden_-_WGA13779.jpg|width=100%]]}}} || || '''출생''' ||[[1710년]] [[5월 14일]][br]슐레스비히 공국 [[슐레스비히]] 고토르프 성|| || '''사망''' ||[[1771년]] [[2월 12일]] (향년 60세)[br][[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왕궁]]|| ||<|2> '''재위''' ||<#E7E7E7,#191919>[[스웨덴 왕국]]의 왕|| ||[[1751년]] [[3월 25일]] ~[[1771년]] [[2월 12일]]|| || '''배우자''' ||[[루이제 울리케|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1744년 결혼),,|| || '''자녀''' ||[[구스타브 3세]], [[칼 13세]], 프레드리크 아돌프, 소피아 알베르티나|| || '''아버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 '''어머니''' ||바덴두를라흐의 알베르티나 프레데리카 공녀[* [[칼 9세]]의 딸 카타리나 공주의 후손이다.]|| || '''형제''' ||요하나 엘리자베트[*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의 어머니.],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아들 빌헬름이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초대 [[대공(작위)|대공]]이다. 본인은 올덴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게오르크 루트비히]]|| || '''종교''' ||[[루터교회]]|| || '''서명''' ||[[파일:아돌프 프레드리크 서명.svg|width=150px&bgcolor=#fff]] || [목차] [clearfix] == 개요 ==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초대 [[스웨덴 국왕|국왕]]이자 225년만에 등극한 [[올덴부르크 왕조]]계의 스웨덴 국왕이다.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 생애 == 1727년부터 1750년까지 [[뤼베크]]의 [[주교공|영주 주교]]였고, 1739년 사촌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von Holstein-Gottorp 1700~1739. [[스웨덴 국왕]] [[칼 11세]]의 외손자로, 원래는 이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도 왕위계승권이 앞섰던 사람이다.]가 사망하자 조카 카를 페터 울리히[* 훗날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를 보좌하는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1741년 집권한 [[러시아 제국]]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를 페터 울리히를 차르 후계자로 지명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스웨덴 왕위 계승자가 되는데 힘을 보태 줄 후원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1741~1743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패배한 스웨덴은 1743년 6월 23일, 옐리자베타 여제의 요구에 따라 그를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1744년,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6녀 [[루이제 울리케]]([[1720년]] ~ [[1782년]])와 결혼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처남이다. 이 젊은 부부는 처음엔 하타르당을 지지했지만 얼마 후 거리를 두었다. 1751년 3월 25일 [[프레드리크 1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옐리자베타 여제의 의도와는 달리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왕비의 조언에 따라 스웨덴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하타르당을 견제하기 위해 뫼소르당을 후원했다. 또한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스웨덴 전역을 여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행보에 의회가 반발하면서, 행정이 거의 마비되었다. 1756년 6월, 국왕 지지파는 권력을 잡기 위한 정변을 계획했으나 실패했고 그들 중 몇 명이 처형되었다. 왕과 왕비는 그들의 왕권 강화 노력을 중단하거나 물러나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다. 결국 의회가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왕위를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이후 1766년 [[안데르스 쉬데니우스]]의 주도로 언론자유법(tryckfrihetsförordning)이 제정되는 것을 허용했으나, 1768년 차남 [[구스타브 3세|구스타브]]의 도움에 힘입어 의회로부터 왕권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 식탐으로 인한 어이없는 사망 === [youtube(QG82lVEjI-I)] 하지만 이렇게 간신히 되찾은 왕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다가 1771년 2월 12일 폭식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2월 13일 재의 수요일 이전에 기름진 고기 등을 맘껏먹는 기름진 화요일이라는 축제가 있었는데, 이미 만찬으로 고기와 랍스터 등을 거하게 즐긴 상황에서 디저트로 나온 [[셈라]]라는 [[빵]]을 정신없이 무려 '''14그릇'''이나 과식한 게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 속재료부터 많이 차있기 때문에 보통 셈라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나 이상을 먹기 힘들지만, 그의 주변의 궁정 신하와 하녀들도 어렸을 적부터 식탐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침소로 돌아온 아돌프 프레데리크는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린다고 호소하다 쓰러졌고 끝내 사망하고 만다. 증세로 보면 폭식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추정된다. [[분류:스웨덴 국왕]][[분류: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분류:1710년 출생]][[분류:1771년 사망]][[분류: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출신 인물]][[분류:리다르홀름 교회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