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심재순}}}'''[br]'''沈載洵[* 沈'''{{{+1 在}}}'''洵이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심재순.jpg|width=100%]]}}} || || '''본관''' ||[[청송 심씨]][* 안효공파-양지공 업(嶪)파 25세 재(載) 항렬.] || ||<|2> '''출생''' ||[[1899년]][* 청송심씨 인터넷족보 5권 369쪽에는 1898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12월 6일]] || ||[[전라북도]] [[옥구군|임피군]] 하북면 입점리[br](현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입점마을) || ||<|2> '''사망''' ||[[1939년]] [[9월 1일]][* 음력 7월 18일.] || ||[[전라북도]] [[옥구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82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9년 12월 6일 전라북도 임피군 하북면 입점리(현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입점마을)에서 아버지 심제섭(沈悌燮, 1880. 6. 12 ~ 1930. 9. 6)과 어머니 [[임(성씨)|풍천 임씨]](豊川 任氏, 1880. 11. 6 ~ 1920. 11. 7)[* 임덕준(任德準)의 딸이다.]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의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시|군산부]](현 [[군산시]])에 있던 [[군산제일고등학교|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 [[군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해 2년간 다니다가 중퇴했다. 이후 상경해 대동인쇄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면서 경성부기학교(京城簿記學校)를 다녔다. 1925년 5월, 부기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라는 자가 경영하던 슌요도(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부터는 일본인 [[가나자와]](金澤)가 경영하는 인쇄소 도세이샤(同聲社)에 고용되어 문선공(文選工:인쇄소에서 활자를 골라 뽑는 일을 하는 직공)으로 일했다. 그는 이곳에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 독립을 실현하는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 고향 옥구군의 후타바샤(二葉社)농장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그해 12월 그는 일본 도쿄에서 「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 '[[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 및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특히 이 글은 당시 [[군산시|군산부]]와 [[논산시|논산군]] [[강경읍|강경면]], [[논산시|논산군]] 등 지역에 있는 비옥한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가와사키]](川崎)·오쿠라(大倉)·[[동양척식주식회사]]·부지(不二)흥업주식회사·후타바샤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들에게는 농민조합을 조직해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 격문을 인쇄해 조선에 거주하던 23촌 지간의 족증조(族曾祖) 심호택(沈鎬澤, 1885 ~ 1956. 6. 4), 14촌 지간의 족조 심상악(沈相岳, 1900. 5. 6 ~ 1984. 10. 17)[* 청송심씨 인터넷족보 5권 388쪽에는 沈相'''{{{+1 嶽}}}'''으로 등재되어 있다.]을 비롯해, 신현국(申鉉局)·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에게도 발송했고, 신현국은 특히 이 격문을 수령해 당시 후타바샤농장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관련된 농민들에게도 배부했다. 1928년 1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며 항일운동의 방법을 제시한 문서를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 9월 6일 아버지 심제섭이 별세하자 귀향했다가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1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31년 8월 19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334&evntId=0034990384&evntdowngbn=Y&indpnId=0000021489&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39년 9월 1일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별세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 오봉산(五峰山)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5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청송 심씨 안효공파]][[분류:군산시 출신 인물]][[분류:군산제일고등학교 출신]][[분류:1899년 출생]][[분류:1939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