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64년 출생]][[분류:1606년 사망]][[분류:조선의 무관]][[분류: 고령 신씨]] ||<-2> {{{#!wiki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여량.png|width=100%]]}}} || == 개요 == 조선 중기의 무신. [[자(이름)|자]]는 중임(重任). [[아호|호]]는 봉헌(鳳軒). 본관은 [[고령 신씨|고령]](高靈). == 생애 == 신여량(申汝樑)은 1564년(명종 19) 고흥(高興)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말 예의판서를 지낸 [[신덕린]](申德隣)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신홍해(申弘海)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동생들과 함께 의주(義州)까지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전장(戰場)으로 나가 [[이순신]](李舜臣)과 연합하여 [[한산도 대첩]]에서 공을 세워 경상우도수군 첨정(僉正)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의 부장이 되어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경상우도수군 우후(虞候)로 특진하여 다시 통영에서 수군을 지휘하였는데, 철정(鐵釘)·불화살 등을 사용하여 적선을 크게 무찔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으로 번번이 큰 공을 세우자 왕은 특별히 당포승전도(唐浦勝戰圖)를 하사하였다. 1598년(선조 31) 절충장군(折衝將軍) 통제영우후(統制營虞候)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709103_003]])]를 거쳐 이듬해 전라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진도 싸움에서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하니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나주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