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 삼한공신)] [include(틀:고려의 배향공신)] ||<-2> '''고려 태조 지정 개국공신 1등[br]삼한공신 [br]개국공(開國公) | 장절공(壯節公)[br]{{{+1 신숭겸}}}[br]申崇謙'''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tlstndrua.jpg|width=100%]]}}} || || '''[[시호|{{{#670000,#fedc89 시호}}}]]''' ||장절(壯節) || || '''[[본관|{{{#670000,#fedc89 본관}}}]]''' ||[[평산 신씨]] || || '''생몰년''' ||[[882년]]([[헌강왕]] 6) ~ [[927년]]([[태조(고려)|태조]] 10) || || '''출신지''' ||전라도 곡성현[*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즉 강원도 춘천 인물로 실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춘천도호부 인물조가 아닌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신숭겸이 실렸는데, 우거조는 글자 그대로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그 지역에 머물며 활동하던 인물에 관한 기록이고 역시 같은 책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산도호부 편에도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인데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원조에도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기록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곡성현 인물조에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에서 성황신은 그 고을 토호의 시조, 조상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셨다. 광해주(光海州)는 강원도 춘천부(春川府)의 신라 때 이름. 경덕왕(景德王) 때 삭주(朔州)를 고친 이름으로, 고려 태조(太祖) 때 춘주(春州)로 개칭되었다.][br](現 [[전라남도]] [[곡성군]] ) || || '''초명''' ||능산(能山) || || '''사당''' ||지묘사(智妙寺) || || '''가족''' ||{{{-2 형제}}} 신능길(申能吉)[br]{{{-2 아들}}} 신보장(申甫藏)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 == 약력 == ||<-3> '''신숭겸의 [[태봉|{{{#fff,#ddd 태봉}}}]] 관작''' || || '''직위''' ||<-2>마군장군(馬軍將軍) || ||<-3> '''신숭겸의 고려 관작''' || || '''공신호''' ||<-2>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 '''시호''' ||개국장절공(開國莊節公)||고려사 예지 태묘조 기록 || == 생애 == 신숭겸은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즉 춘천 인물로 실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춘천도호부 인물조가 아닌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신숭겸이 실렸는데, 우거조는 글자 그대로 그 지역 출신이 아닌 그 지역에서 머물며 활동하던 인물에 관한 기록이고 역시 같은 책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산도호부 편에도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인데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고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원조에도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군|곡성현]] 출신으로 기록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곡성현 인물조에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에서 성황신은 그 고을 토호의 시조, 조상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성황신으로 모셨으니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으로 춘천으로 옮겨와 활동한 인물이다.[* '차현 이남, 공주강 밖(外)' 사람을 쓰지 말란 구절의 차현을 차령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 차현과 차령은 전혀 다르고 공주강 밖(外)의 해석도 생략하거나 공주강 이남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공주성 기준 공주강 이북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 차이가 있다. 딱히 고려 [[왕조]]가 [[호남]] 출신 인물을 [[차별]]한 사례가 없고 왕건의 혁명 직후 궁예 정권의 인물인 [[이흔암]]이 죽임을 당하자 왕건에게 저항하던 [[청주시|청주]] 같은 지역이 있기도 했다. 오히려 신숭겸, [[최지몽]], [[박영규]] 등 왕건에게 호남 출신 최측근이 있었고 대우받았다.] [[궁예]] 시절에 무장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 궁예가 [[막장]] 테크를 타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손을 잡고 [[태조(고려)|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고려를 [[건국]]한 개국 1등공신이다. 이후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받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aando.jpg|width=100%]] }}} || 신숭겸의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함께 [[황해도]] [[평산군|평산]]으로 사냥을 나간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는데 이 이야기가 평산 신씨의 본관이 평산이 되는 유래이다. 신숭겸 이전에는 [[성씨]]가 없었고 출신은 미천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 중앙의 [[왕족]], [[귀족]]층이나 [[장보고]]처럼 [[중국]]물 먹은 사람이 아니면 지방 명문가 출신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후백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찬]]이었던 [[능환]]조차 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능환이 [[상주시|상주]]에서 견훤을 따라다니던 패거리였다는 이력은 이환경의 창작이며 호남 지역의 [[호족(한국사)|호족]] 출신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 그 외에도 정2품 대광이었던 [[만세(고려)|만세]]나 매곡성주 [[공직(고려)|공직]] 등 고위층이나 유력가이면서도 성씨가 전해지지 않는 사례는 많다. [[고려사]] 태조 시기를 살펴보면 성씨가 없는 관료나 호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동일 시기에 성씨가 전해지는 [[박지윤(고려)|박지윤]], [[유천궁]] 같은 유력 호족들 역시 당대에 자칭하고 세보를 꾸몄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씨들의 시조가 [[후삼국시대]] [[호족(한국사)|호족]]이다.[* 원삼국시대에 성씨가 도입되었다고 해도 그렇게 활성화 되지는 않아서 신라 최초의 성씨로 추정되는 진흥왕의 경우에도, 우리측 공식적인 기록인 진흥왕 순수비, 경주 신성비에도 진흥왕의 성씨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늘날 본관에 해당되는 소속부명인 촌명(村名)과 '진흥'이라는 이름만 등장한다. 우리 성씨가 중국 성씨와 다른 점으로 중국은 본관에 대한 개념이 따로 없지만 우리 성씨는 성씨보다 본관의 유래가 더 오래되었다. 중국측 사서에서 진흥왕의 성씨로 김씨(金氏) 또는 진흥왕의 큰 아버지 법흥왕은 모씨(募氏)라는 기록을 근거로 다만 우리 학계는 '모(募)'를 성씨가 아닌 이름의 일부로 보고 있으며, 이에 따라 중국측 기록을 오류로 본다. 그래서 김씨(金氏)가 등장한 진흥왕을 신라 최초의 성씨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경우에도 경주 이씨 시조 알평과 중시조 이거명 사이에서 본격적인 성씨의 등장은 이거명부터이다. 고려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 등에서 인물들에 성씨가 붙어서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시대에 존재했던 비문 등에서 성씨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원삼국시대부터 성씨가 있었다고 해도 본격적인 성씨의 등장은 통일신라 말기, 고려 초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의 성씨 개념은 일부 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문종(고려)|문종]] 9년(105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문종이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봉미제도(封彌制度)라는 법령을 내리게 되면서 귀족들이 성씨를 사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문종이 그런 법령을 내린 이유는 그 전에는 명문가 출신들도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 사용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호족 출신인 태조 왕건의 경우도 어떠한 기록에도 선대의 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치 않다. 문종 9년 이전에도 김씨나 박씨 같은 왕족, 백제 [[대성팔족]], 가야계 [[김해 김씨]], [[신라삼최]]와 같이 중앙의 일부 귀족은 성씨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왕건이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인 호족들에게 본관과 성씨를 지정해주는 ‘토성분정’을 실시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귀족들의 성씨 사용이 활성화 되지 않자 이를 보완한 게 문종 9년 과거 응시자의 본관과 성씨를 응시 자격으로 하는 ‘봉미 제도’이다. 본명이 '능산'이고 동생 이름이 '능길'인 걸 보면 성을 칭할 정도의 유력가가 아니더라도 뭘 알긴 아는 집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청주의 호족이던 청주수(淸州帥) 진선, 선장 형제의 예도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으로부터 성씨의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이름에 같거나 비슷한 글자를 넣어 성씨의 기능을 대신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고려 개국에 기여한 무장들 중에서는 일찍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던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에게 참패하고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은 [[고제(전한)|한고제 유방]]을 살리기 위해 [[미끼]]가 되어 죽은 [[기신(초한쟁패기)|기신]]을 본따 자신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빌려 입고 미끼가 되어 후백제군을 유인했으며, 왕건은 일반 군졸의 옷을 입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신숭겸의 희생 덕분에 왕건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이 왕건인줄 알고 쫓았고 결국 신숭겸은 전사했으며 함께 유인 작전에 나선 [[김락]], [[김철#s-1.6]], [[전이갑]]·전의갑 형제와 그 사촌동생인 [[전락]], 개국공신 평장사 [[호원보]], 대상 손행을 포함한 8명의 장수가 전사했고 김철 혼자 생존해서 후백제 멸망전인 [[일리천 전투]]에도 참전하는 등 후삼국 통일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이 때 4명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장수가 전사하였다 하여 공산의 이름이 [[팔공산]]이 되었다 한다. 훗날 참수된 신숭겸의 [[시신]]은 왼쪽 발 밑에 [[북두칠성]] 모양의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겨우 찾았지만 [[머리]]는 끝내 찾지 못해서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고, 미리 정해둔 [[왕릉|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에 매장해주었다. 신숭겸의 [[무덤]]은 봉분이 3개인데 머리를 대신한 황금 두상을 지키고자 이렇게 했다고 전한다. 이 묘자리는 풍수지리가들이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극찬하기도 한다. 가보면 석물 같은 게 없을 뿐이지 영락없는 왕릉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며 맑은 날씨에 묘로 올라가보면 춘천시내가 훤히 보인다. == 기타 == * 고려 16대 왕 [[예종(고려)|예종]]이 서경([[평양]])의 [[팔관회]]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이상히 여겨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왕건|태조 신성대왕]]이 [[견훤]]과 싸우다 궁지에 몰렸을 때 대신해 전사한 공신이다. 그 공을 높이고자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는데 태조께서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래서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듣자 예종이 감격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인 '[[도이장가]]'[* 두(二) 장군(將)을 애도하여(悼) 노래(歌)하다.]를 지어 두 사람의 넋을 기렸다. * 고려를 이은 [[조선]] 왕조도 신숭겸을 충절의 본보기로 삼아 후손이 혜택을 입었다. 신숭겸의 [[평산 신씨]]는 조선의 무반 명문가 중 하나로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같이 남한강에 투신자살한 [[신립]]과 신경지, 임진왜란 때 [[해유령 전투]]에서 임진왜란 첫 번째 승리를 거두었으나 장계를 올리지 않아 탈영한 걸로 착각한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당한 [[신각]],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하다가 [[남원성 전투]] 때 전사한 [[신호(조선)|신호]],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신경진]], [[나선정벌]] 때 조선군 사령관이었던 [[신류]], 조선이 [[강화도 조약]]과 [[조청수륙무역장정]] 등의 근대 조약을 체결할 당시 조선 측의 대표였던 [[신헌]], 독립군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통의부]]의 총사령관이었던 [[신팔균]], [[구한말]] 최초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도 평산 신씨다. 반면 문반이었던 [[신잡]]과 [[신흠]]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으며 특히 신흠은 [[탄금대 전투]] 때 참전까지 했으면서 살아남아서 [[인조반정]] 이후까지 활약했다. * 대구 [[지묘동]]에 사당이 있고, 파군재 삼거리에 [[동상(조형물)|동상]]이 있다. 그리고 역시 대구 파군재 삼거리 근처에 표충단이 있으며 묘는 [[춘천시|춘천]]에 있다. 참고로 춘천의 신숭겸 묘는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황금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도굴되지 않기 위함이라는 설과 그냥 부인을 함께 안장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 신숭겸의 묘는 '''총 10개''' 있다. 도굴 방지용 가묘가 구월산과 신숭겸이 전사한 팔공산에 각각 3개씩 있고, 춘천에 도굴방지용 가묘가 2개 더, 그리고 몸이 묻혀 있는 상술한 봉분 3개의 무덤까지 3개, 그리고 머리는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 묻혀 있다. 중국 허창에는 목이, 당양에는 몸이 묻혀 있는 [[관우]]와 비슷한 셈이다. 여담으로 춘천에 있는 신숭겸 장군묘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당 중에 하나라고 한다. 태안사에 몇 가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신숭겸의 애마가 신숭겸의 목을 들고 여기까지 와서 3일을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하며, 목과 말을 묻고 장군단이라 하여 매년 3월 16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호환이 일어나는 등 사찰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 대중매체 == === 드라마 [[첫사랑(KBS)|첫사랑]] === 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니만큼 직접 나오는 건 아니고 제26화에서 그의 [[무덤]]이 나온다. 이 때 [[https://blog.naver.com/jidoo1990/221164901143|무덤을 둘러보는 사람]]이 성찬혁을 연기한 [[최수종]]인데 나중에 그가 [[태조 왕건]]에서 [[신숭겸(태조 왕건)|신숭겸]]의 주군인 왕건으로 나오는 걸 생각하면 [[배우 개그|묘하다]]. === 드라마 [[태조 왕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숭겸(태조 왕건))] === 게임 [[천년의 신화]] === [[천년의 신화]](왕건 미션)에서는 언월도는 수달에게 주고 [[이규|흑선풍 이규]]마냥 쌍도끼를 투척하는 식으로 공격한다. 여담으로 4기장([[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과 의형제들 중 유일하게 극중에서 처음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능산이라는 초명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왕건으로부터 신숭겸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고증대로라면 이게 정확하다. === 게임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http://gall.dcinside.com/zohong/93017|고대 무장 병종 정보]]에 데이터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병종은 궁기병계. 하지만 이후 게임이 종료되어 볼 수 없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고려사)] [각주] [[분류:882년 출생]][[분류:927년 사망]][[분류:곡성군 출신 인물]][[분류:평산 신씨]][[분류:고려의 배향공신]][[분류:고려 개국공신]][[분류:고려의 군인]][[분류:전쟁 사망자]][[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개명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