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마한의 국가)] [목차] == 개요 == {{{+1 臣濆活國}}} [[마한]] 54개국 중 하나.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앞 부분에 나온 것으로 보아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자의 형태가 비슷한 신분고국(臣濆沽國), 신분첨국(臣濆沾國), 신책첨한(臣幘沾韓), 신분고한(臣濆沽韓)[* 삼한의 소국명 뒤에 국(國) 대신 한(韓)을 붙이는 용법은 당시에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정사)|삼국지]]》 〈위지〉 한전에서 '구야국(狗邪國)'으로 기록된 [[변한]] [[금관국]]은 같은 문헌의 왜인전에서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었다.]으로도 전해진다. 재구된 서주 시대의 [[상고한어]]에 따르면 '분'(濆)의 발음은 당대에 /*prals/ 또는 /*bɯl/이었기 때문에, '분'(濆)은 다른 소국명에서 나오는 '비리'(卑離)와 같이 "[[벌]]"을 뜻하는 어휘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상고한어 재구음은 《삼국지》 동이전의 연대인 서기 3세기와 시대적 간극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 비정 위치 == 처음 [[이병도]]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陽城)면의 [[고구려]] 시절 지명 '사복홀(沙伏忽)' 혹은 '사파을(沙巴乙)'이 '신분'과 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신분활국의 위치를 이곳으로 비정했다.[* 《삼한문제의 신고찰》, 1936.] 그러나 신분의 신(臣)은 3세기 당시의 발음이 /*ɡin/으로 재구되므로[* Schuessler (2007)의 후한 시기 재구음에 의거한 것이다.] '사(沙)'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한편 [[천관우]]는 《[[삼국지(정사)|삼국지]]》가 기록한 마한 소국들의 순서가 대체로 북에서 남 방향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6번째인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강원도 춘천에 비정되고, 8번째인 [[백제|백제국]](伯濟國)이 서울특별시 강남에 비정되므로 7번째인 신분활국은 대체로 그 사이인 가평에 비정될 것이라고 추측했다.[* 《마한제국의 위치 시론》, 1979.] == 기리영 전투의 주체 == 서기 [[246년]]에 일어났던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고려되는 유력 후보이다.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명나라 이후의 《[[삼국지(정사)|삼국지]]》 판본에서 "신지가 격분하고 한인들이 분노하여(臣智激韓忿)"라고 되어 있는 구절이 [[남송]]의 서적 《통지(通志)》에 인용된 보다 오래된 판본에서는 "'''신분고한'''이 분노하여(臣濆沽韓忿)"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https://ctext.org/library.pl?if=gb&file=8296&page=23&remap=gb|#]] 이 설은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고이왕]]이 이끌던 백제국이었을 것이라는 기존 가설의 의문점을 해결하기에 현재 사학계에서 정설에 가깝게 거론되고 있다. 앞 문단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활국은 [[백제|백제국]]보다도 북쪽인 경기도 북부 일대에 위치했으므로 [[황해도]] 지방의 [[대방군]]과 교전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정사)|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삼한 각국의 지도자인 [[신지#s-1.2]]들 중 수장 [[목지국]]의 [[진왕]]을 제외하고 특별히 우대되는 신지들의 호칭으로 [[금관국|구야국]]의 진지렴(秦支廉), [[안라국|안야국]]의 축지(踧支), [[침미다례|신운신국]]의 견지보(遣支報)와 함께 분신(濆臣)의 리아불예(離兒不例)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분신'은 '신분(臣濆)'을 잘못 기재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신분활국은 금관국, 안라국 및 침미다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당시 마한에서 유력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개 소국이 [[위(삼국시대)|위나라]]의 [[한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이 나라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이미 [[온조왕]] 시대부터 마한 일대를 병합했다고 한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백제본기〉의 마한 병합 기록은 《삼국지》 및 고고학적 기년과 교차 검증한 결과 후대인들에 의해 연대가 앞당겨졌다는 설이 유력하므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분활국을 비롯한 마한 북중부의 소국들은 백제 [[고이왕]] 때 병합되었고, [[침미다례]]를 비롯한 남부의 소국들은 [[근초고왕]] 때 복속되어 [[무령왕]] 때 직할령으로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 멸망 시기 == 대부분의 [[원삼국시대]] 소국들이 늘 그렇듯이 멸망 년도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신분활국은 [[기리영 전투]]의 주체로 추정되므로, 《[[삼국지(정사)|삼국지]]》의 기록에 "'''한(韓)을 멸하였다'''"는 구절이 있기에 246년 이후에 멸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설에 따르면 고이왕 시대 이후 백제가 갑자기 성장한 것은 백제가 이 시기 이후 한강 중·상류로 패권을 확대하며 대중국 무역 경로를 차지하고, 철기 문화를 확실히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강 하구 및 서울/경기 지역은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철기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후진적인 곳이었다. 오히려 한강 상류 지역에서 기원전·후부터 철기 관련 고고학적 유물이 꾸준히 나타난다. 그리고 3세기 중반 고이왕 대 이후로 한강 하류에서 철기 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4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인 제철 유적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만일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신분활국은 경기도 지역의 국가이므로 3세기 중반 백제 [[고이왕]]에 의해 흡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초고왕]] 때 복속된 소국들은 주로 전라도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분류: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