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鳳祚 [[1900년]][* 영산·영월신씨대동보 11권 381쪽에는 1897년생으로 등재돼 있다.] [[8월 20일]][* [[음력]] [[7월 26일]]. [[https://www.ewha.hs.kr/bbs/board.php?bo_table=0103|이화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참조]].][* [[http://db.history.go.kr/id/hd_017r_0010_0410|1919년 6월 18일 예심판사 신문조서]]에는 7월 17일생,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803&evntdowngbn=Y&indpnId=000000793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 1심 판결문]]에는 7월 22일생, [[http://weeklymorning.com/cms/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6|모닝뉴스]]와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663&evntdowngbn=Y&indpnId=000000780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판결문]]에는 7월 23일생 등으로 각각 다르게 기재돼 있다.] ~ [[1992년]] [[12월 27일]] (향년 92세)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교육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영산 신씨|영월]](寧越)[* 판서공파(判書公派) 31세 재(在) 항렬. 족보명은 신재봉(辛在鳳).], 호는 화암(和巖)이다. [[창씨개명|창씨명]]은 가라시마 준(辛島純). == 생애 == 1900년 8월 20일 [[강원도]] [[정선군]] 서상면 상평리(現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 상평마을)에서 아버지 신기묵(辛綺默, 1868 ~ 1930. 5. 4)[* 이명 신한섭(辛漢燮).]과 어머니 [[정선 전씨]](1867 ~ 1933. 5. 28)[* 전공여(全公汝)의 딸이다.]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http://db.history.go.kr/id/hd_014r_0010_1170|태어났다]]. 이후 정선군 [[정선읍|정선면]](現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 280번지로 이주해 [[http://db.history.go.kr/id/hd_014r_0010_1170|본적을 두었다]]. 12살 되던 1911년 [[개신교]]([[감리회|북감리회]])에 입교해 [[정동제일교회|정동예배당]]에 주로 [[http://db.history.go.kr/id/hd_017r_0010_0410|출석했다]]. 일찍이 정선공립보통학교(現 정선초등학교) [[http://db.history.go.kr/id/hd_014r_0010_1170|졸업 후]] 상경한 뒤 [[경기도]] [[경성부]] [[효자동(종로구)|효자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종로구)|효자동]]) 77번지 임재덕(林在德)의 집에 기거해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임재덕의 어린 자식들을 가르쳤으며, 이렇게 번 돈으로 [[배재고등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現 [[배재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밖에 고향 집과 배재고등보통학교로부터 각각 매달 5원씩 보조를 받았음에도 형편은 녹록지 않았으나, 그 뒤 김운호(金雲鎬)[* [[http://db.history.go.kr/id/hd_014r_0010_1170|1919년 3월 7일 조선총독부 검사 신문조서(신봉조)]]. [[http://db.history.go.kr/id/hd_017r_0010_0410|1919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신봉조)]]에는 김운현(金雲鉉)으로 기재돼 있다.]의 후원으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할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둔 1919년 2월 신체검사를 받은 뒤 무시험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이 즈음에는 경성부 [[정동]](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정동]]) 34번지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803&evntdowngbn=Y&indpnId=000000793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진학 후 쓸 용돈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원서동|원동]](現 종로구 [[원서동]])에 있던 김운호의 집에 찾아가던 도중 [[종로2가|종로2정목]](現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육각당(六角堂)[*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345139&categoryId=33387|탑골공원 팔각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이 [[암모나이트]] 같은 남자가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얼마 뒤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만세시위에 참여하던 군중들 중에서도 500~600명 가량되던 학생들의 행렬에 가담해 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1가|종로1정목]]에서 봉래정2정목(現 [[중구(서울)|중구]] 봉래동2가) [[남대문역]], [[의주로|의주통]](現 중구 [[의주로]]), [[평동(종로구)|평동]](現 종로구 [[평동(종로구)|평동]]) [[서대문]], [[정동]](現 중구 [[정동]]), 정동 [[주한미국공사관|주일미국공사관 소속 주 경성 영사관]], [[태평로(서울)|태평통]](現 중구 [[태평로(서울)|태평로]]), [[을지로|황금정]](現 중구 [[을지로]]), [[종로]][* 신봉조의 배재고등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였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1979|성주복]](成周復) 또한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해 종로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http://db.history.go.kr/id/hd_017r_0010_0440|1919년 6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성주복)]]에 따르면, 신봉조는 성주복의 반 급장이었다고 한다.],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 [[세종로|광화문통]] [[경복궁 광화문]], [[합동]](現 [[서대문구]] [[합동]]) [[주한프랑스대사관|프랑스영사관]], 평동 서대문, [[신문로|서대문정]](現 종로구 신문로), [[소공동|장곡천정]](現 중구 [[소공동]]), [[충무로1가|본정1정목]](現 중구 [[충무로1가]]) [[경성우편국]] 모퉁이, [[충무로2가|본정2정목]] 경성전기주식회사 앞, 본정1정목 경성우편국 앞을 거쳐 [[남대문로2가|남대문통2정목]](現 중구 [[남대문로2가]]) [[조선식산은행]]에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http://db.history.go.kr/id/hd_017r_0010_0410|1919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신문조서(신봉조)]]에서, 당시 예심계 직무대리 조선총독부 판사 호리 나오요시(堀直喜)가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신봉조는 "[[3.1 운동|이번 운동]]의 결과 독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신봉조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것을 보면 다소 [[아이러니]]한 대답이다.] 결국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http://db.history.go.kr/id/hd_015r_0010_0020|예심이 청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 [[http://db.history.go.kr/id/hd_015r_0020_0010|투옥되었다]].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663&evntdowngbn=Y&indpnId=000000780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975&evntId=0034975803&evntdowngbn=Y&indpnId=000000793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아]] 출옥했다. 출옥 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복학했으나, 기존에 입학 예정이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에는 자연스럽게 입학 취소가 되었고 대신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2월 9일 조선학생회 창립총회에서 연희전문학교 대표로 참석해 상무집행위원에 [[http://db.history.go.kr/id/su_007_1923_02_09_0450|선임되었다]]. 1924년 졸업 후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일본]]에 유학해 1930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도호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8년 12월 제8대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고등여학교]](現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 역대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장들 중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유일한 남자 교장이다.]에 [[https://www.ewha.hs.kr/bbs/board.php?bo_table=0103|취임했다]]. [[태평양 전쟁]] 중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서 조직한 '채권 가두 유격대' 서대문대(西大門隊)에 소속되어 [[신흥우]]·[[주요한]] 등과 함께 "총후봉공(銃後奉公)은 채권으로부터"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태평양 전쟁 자금으로 쓰기 위해 채권을 [[http://db.history.go.kr/id/pj_001_0030_0010|파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9월 30일 새교육협회 창립총회에 발기인으로 [[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29_0080|참여했다]]. 1949년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1953년 3월 [[서울예술고등학교|이화예술고등학교]](現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했다. 1961년 10월 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학교법인 이화학원 [[상무이사]] 및 이사장, [[상명학원]] 이사장, [[한양학원]] 이사, 영훈학원 이사, [[학교법인 연세대학교]] 이사 및 부이사장 등을 [[http://weeklymorning.com/cms/bbs/board.php?bo_table=news&wr_id=196|지냈다]]. 1972년 8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받았고, 서울특별시 문화상(교육부문)을 수상했다. 1992년 12월 27일 새벽 3시 30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 48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22800329122009&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12-28&officeId=00032&pageNo=22&printNo=14628&publishType=00010|별세했다]]. == 여담 == * [[청주 한씨]] 한희숙(韓熙淑, 1906. 12. 27 ~ )[* 초명은 한만복(韓萬福)인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39070100239204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9-07-01&officeId=00023&pageNo=4&printNo=6519&publishType=00020|1939년 7월 1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미 한희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으므로 한만복은 아명으로 보인다.][* 한인태(韓仁泰)의 딸이다.]과 결혼해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 이 중 아들 신융선(辛隆善, 1936. 4. 1 ~ )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로스앤젤레스 캠퍼스|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 [[워싱턴 대학교|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한 뒤 미국의 석유 회사 텍사코에서 [[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8|근무한 바 있다]]. 또한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의 셋째 딸 [[수원 백씨]] 백남주(白南州, 1939. 5. 26 ~ )와 결혼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영월 신씨]][[분류:정선군 출신 인물]][[분류:1900년 출생]][[분류:1992년 사망]][[분류:배재고등학교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분류:도호쿠대학 출신]][[분류:국민훈장 모란장]][[분류:대한민국의 감리회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