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개요 == 辛棄疾, 1140~1207 [[남송]] 시기의 시인. 자는 유안(幼安), 호는 가헌(稼軒)[* 농업을 중시하였고, 상업을 경시하는 뜻이기도 하다.]으로, 산동 역성 출신이다. [[소식]]과 함께 호방파를 대표하여 '''소신'''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제남 출신의 여류 시인인 [[이청조]]와 함께 '''제남이안'''이라고 불렸다. == 생애 == 1140년 산동 역성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금나라의 군대에 의해 북중국이 유린당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의 할아버지 신찬은 [[정강의 변]]으로 송 황실이 남하한 후 도망가지 못하고 금나라에 벼슬을 하였음에도 신찬은 무기를 들고 금나라와 싸우기로 다짐했다. 신기질도 마찬가지로 한족들이 여진족 치하에서 겪는 굴욕과 고통을 끊임없이 목격했고, 중원을 회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소년 시절에는 당회영과 함께 유첨에서 공부하여 '신당'이라고 불렸다. 1161년 [[해릉양왕|완안량]]이 남하할 때 그 후방의 한인들은 금나라의 가혹한 압제에 저항했다.[* 여기서 거란인들도 강제 징집을 당해 불만이 상당했다.] 21세의 신기질도 2,000명을 모아 봉기군에 참여했고, 서기장을 맡아 문서를 주관하고 기밀을 담당하였다. 금나라 진영의 내분[* [[채석기 전투]]에서 명재상 [[우윤문]]에게 가로막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안량은 사흘 안에 장강을 건너라고 했다.]으로 결국 완안량이 전선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여[* [[야율원의]]가 해릉양왕을 시해하였다.] 금군이 북쪽으로 후퇴하자 1162년 남송 조정에 연락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가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경경이 반역자 장안국에 의해 살해되고 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50여 명을 이끌고 수만 명의 적진을 습격하여 반역자를 건강으로 데려가 남송 조정에 넘겨 처형했다. 봉기군에서의 활약, 놀라운 용기와 결단력으로 한때 명성을 얻었다. 송 고종은 그를 강음표판으로 임명하였고 이 때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가 처음 남쪽에 왔을 때 남송 조정의 비겁함과 위축에 대해 잘 몰랐지만, 송 고종이 그의 용맹한 행동을 칭찬했고, 얼마 후 즉위한 송 효종도 한때 실지를[* 중원 일대] 회복하고 복수를 하려는 예기를 보여 북벌에 대한 건의를 적지 않게 썼다. 이 건의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널리 알려졌으나 조정에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신기질이 건의서에서 보여준 실제 재주에만 관심이 많았다. 1168년부터 잦은 이동과 승진을 했으나 이는 신기질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밤낮으로 사막을 누비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호탕하고 억척스러운 성격과 북벌에 집착하는 열정 때문에 관직에 발을 붙이기 어려웠고 신분도 그의 벼슬길을 막았다. 그 후 지방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비호군'을 창설하였으나 1181년 11월에 탄핵되어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였다. 일찍이 1180년에 융흥부와 강서안무사를 다시 맡았을 때, 신기질은 상요에 정원식 장원을 지어 가족을 정착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봄에 대호(帶湖)의 새 주택과 장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수를 끼고 있는 지형에 따라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낮은 곳에 밭을 개척한다'는 장원 구도를 직접 설계하며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생은 부지런하니 역전을 먼저 하라. 그래서 그는 대호 장원을 '가헌'이라고 이름 붙였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가헌거사'라고 불렀다. 그 역시 오랫동안 남들에게 용납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벌써부터 은둔을 각오하였다. 파직되었을 때, 대호의 새 집은 마침 완공되었고 상요로 돌아온 후 20년 동안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골에서 한가로이 보냈다. 1188년 겨울, 그의 친구 정량이 고향 저장성 영강에서 신기질을 방문했고, 두 사람은 연산 장가에서 서로 제2차 아호지회라고 답했으며 그 후 신기질은 계속해서 두 차례나 관직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정여해, 양민첨, 한원길 등과 교제하고 세상사에 대해 극론하거나 긴 노래를 부르며 정을 나누면서 주희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 1192년부터 1194년까지 복건제형, 복주지주, 복건안무사 등을 지냈고, 그 사이 한때 조정에 귀속되어 태부경(太府卿)을 지냈으나 다시 탄핵되어 파직당한다. 같은 해 여름 병을 핑계로 상요로 돌아와 표천에 살면서 새 집을 짓고 표천 장원을 운영하며 문 앞에 버드나무를 심기로 결심했다. 경원 2년(1196년) 여름, 대호농원에 불이 나 연산에서 사천표(思泉瓢)로 이주했다. 신기질은 표천에 있는 동안 표천의 사시풍경, 세상 정서와 민속, 정원 풍물을 묘사하는 많은 시와 시를 썼다. 1198년 주관인 충우관에 임명된다. 1203년 북벌을 주창한 [[한탁주]]는 주전파를 기용하여[* [[악비]]를 악왕으로 추봉했고, [[진회]]의 시호를 무추로 낮추었다.] 64세였던 그는 지소흥부 겸 절동안무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1204년)에는 진강부(鎭江府)로 차질된다. 1204년 송 영종 조확을 만나 금나라가 반드시 난이 있고 멸망할 것이라고 하여 조정의 청을 받았고 얼마 후, 금대를 받았다. 이후 당시 재상이었던 [[한탁주]]가 자신의 권세를 위해 북벌을 강행하려 하나, 반대한다. 1207년 가을[* 한탁주의 [[개희북벌]]이 실패한 때였음]에 조정은 다시 신기질을 추밀도승지로 기용하여 임안부로 부임하게 했으나 조서가 연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병으로 중태에 누워 있었고 그해 9월 10일(10월 3일),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233년 광록대부로 추증되었고 1275년 소사로 추증되었으며, 충민(忠敏)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 주요 작품 == * <영우악ㆍ경구북고정회고(永遇樂.京口北固亭懷古)>[* [[남송]]이 [[금나라]]를 치려고 할 때 지었다.] * <청옥안ㆍ원석>[* 이 시의 구절 중 일부에서 중국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가 탄생하게 된다.] == 대중매체에서 == 중국 영화인 《[[신기질:중원의 결사대]]》에서는 사묘가 신기질 역할을 맡았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40년 출생]][[분류:120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