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초한쟁패기/인물]][[분류:기원전 163년 사망]][[분류:한나라의 공신]] ||||||||||<#c0c0c0><:>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 || '''12위 안국후(安國侯) [[왕릉(전한)|왕릉]]''' || {{{+1 ←}}} ||<#000000> '''{{{#white 13위 극포후(棘蒲侯)시무}}}''' || {{{+1 →}}} || '''14위 청양후(清陽侯) 왕흡''' || [include(틀:한서)] || '''생몰년도''' || ? ~ 기원전 163년 || || '''[[이름]]''' || 시무(柴武)[* 성씨가 시(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진(陳)이라 불리기도 한다.] || || '''[[작위]]''' || 극포후(棘蒲侯) || || '''직위''' || 대장군(大將軍) || || '''[[시호]]''' || 강후(剛侯) || [목차] == 개요 == [[초한쟁패기]] 때 [[전한]]의 [[장군]]. 진무라고도 불린다. == 생애 == 원래는 [[고제(전한)|유방]]의 부하가 아니었고 고향도 패현 출신이 아니다. 독자적인 세력 2500명 정도를 이끌고 설(薛) 땅에서 거병하여 [[진나라]]에 맞섰고 유방에게 찾아가 부하가 된 것은 한왕 2년(기원전 205년)이었다. 그 후 [[초한쟁패기]]에는 [[한신]]의 지휘하에서 [[관영]], [[장오]] 등과 함께 부장으로 활약하여 제나라 정복에 큰 활약을 했고 특히 역하[* [[산둥성]] [[지난시]] [[리샤구]]]에 주둔한 제나라 군을 크게 무찔러서 극포후(棘蒲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한신과 같이 제나라에 주둔하다가 [[해하전투]]에 한신이 나서면서 중군을 맡은 [[고제(전한)|유방]]의 뒤에서 [[주발(전한)|주발]]과 함께 후군으로 참여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장군으로서 다양한 활약을 보였는데 그 중 하나는 [[흉노]]에게 붙어서 역으로 한나라를 침공한 [[한왕 신]]을 무찌르고 죽인것이다.[* 처음에는 회유하려 했으나 [[한왕 신]]이 이제 돌이킬 수 없다면서 끝까지 저항하자 죽였다.] [[영포]]와의 싸움에서 후유증을 입고 죽은 유방, 숙청당한 [[한신]], [[팽월]] 등이 죽은후에도 오래 살아서 [[한문제]]를 옹립하고 제북왕 유흥거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단 문제가 있다면 기원전 174년, 그의 아들인 시기(柴奇)가 회남여왕 [[유장(전한)|유장]]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발각돼서 죽고 봉국의 세습이 무산됐다.] 이후 기원전 163년에 사망. 가문은 [[한선제]] 시절인 기원전 61년에 증손자인 시가(柴嘉)가 조서를 받아서 재건했다. == 여담 == 유방의 수하들 중에서 진비(陳濞)[* 기원전 162년 사망]를 빼고 가장 오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