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濃藤四郎 [목차] == 일본도 중 하나 == [[파일:external/www.pref.yamagata.jp/k064.jpg]] ||||||||<:><#424242> '''{{{#white 시나노 토시로(信濃藤四郎)}}}''' || ||<:><#E0E0E0> '''도공''' ||<:> 아와타구치 요시미츠(粟田口吉光) ||<:><#E0E0E0> '''도파''' ||<:> [[아와타구치]](粟田口)|| ||<:><#E0E0E0> '''제작 시기''' ||<:> [[가마쿠라 시대]] ||<:><#E0E0E0> '''종류''' ||<:> [[단도|단도]] || ||<:><#E0E0E0> '''길이''' ||<:>23.3 ㎝ ||<:><#E0E0E0> '''현존 여부''' ||<:> 치도 박물관(致道博物館) 소장 || ||<:><#E0E0E0> '''명문''' ||<:>吉光 ||<:><#E0E0E0> '''문화재 등록''' ||<:> [[중요문화재]] 공예품 제 1023호 || [[가마쿠라 시대]]의 도공이자 단도 제작의 명수로 알려진 아와타구치 요시미츠(粟田口吉光)가 제작한 단도. [[http://kunishitei.bunka.go.jp/bsys/index_pc.html|국가 지정 문화재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온 자료에 의하면 길이 23.3 ㎝, 자루 길이 9.5 ㎝이다. 다만 18세기 초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으로 작성된 교호명물장(享保名物帳)에는 八寸二分(환산 시 약 24.846 ㎝)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야마가타]] 현 츠루오카 시에 위치한 치도 박물관(致道博物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본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인 나가이 나오마사(永井尚政, 1587~1668)가 소지했던 단도이다. 그가 시나노노카미(信濃守)[*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관직인 [[코쿠시]](国司)의 하나로, [[시나노]] 국의 행정을 맡는다.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에는 그 권한을 죄다 [[다이묘]]들에게 빼앗겨 코쿠시는 명목상의 직위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다이묘]]들은 집안의 명예와 격을 높이기 위해 코쿠시의 자리를 구하려 했고, 한 지역의 코쿠시에 여러 인물이 임명되는 경우도 잦아지게 된다.]의 직위를 지니었기 때문에 나가이 시나노노카미 나오마사로도 불렸고, 때문에 이 단도에 시나노 토시로란 이름이 붙었다. 후일, 나오마사는 시나노 토시로를 쇼군가에 헌상했다. 이후 163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양녀 오오히메(大姫, 세이타이인(清泰院)으로도 알려짐)가 후일 [[카가]] 번주가 되는 마에다 미츠타카(前田光高)에게 시집을 가면서 혼수 선물로 건너갔다. 1639년에는 쇼나이 번(庄内藩, 지금의 [[야마가타]] 현 서부)의 번주인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에게 몰래 팔렸다. 이 매각 사실은 쇼군가에 알려지지 않도록 했는지 교호 명물장에는 빠져 있다. ~~혼수선물을 팔아치웠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후 쇼군가에 돌아왔다가 나베시마 타다나오(鍋島忠直)에게 하사된 후 다시 사카이 가의 소유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1935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사카이 [[백작]]가([[화족]])가 소장하였다. 이후 1950년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1986년 도둑을 맞았는데, 1989년이 되어서야 [[사이타마]] 현 경찰에 의해 절도범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도쿄]] 도와 22개 현을 돌면서 시나노 토시로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 문화재를 포함해 약 22억 원 상당을 털었다고 한다. 아무튼 천만 다행으로 시나노 토시로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현재는 쇼나이 사카이가와 인연이 있는 치도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치도 박물관에서는 시나노 토시로를 2016년 10월 1일부터 30일까지 국보로 지정된 다른 사카이가의 도검들 및 여러 유물들과 더불어 특별전에서 전시한다고 한다. == [[도검난무]]의 등장 캐릭터 == [[시나노 토시로(도검난무)]] [[분류:일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