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 제국 외무대신]][[분류:일본 외무대신]][[분류:일본의 부총리]][[분류: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분류: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분류:1887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분고오노시 출신 인물]][[분류:외교관 출신 정치인]][[분류:정3위]][[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 [include(틀:역대 일본 부총리)] ---- [include(틀:역대 일본 외무대신)] ---- ||<-2> {{{#fff '''일본 제국 제61·64·75-77대 외무대신[br]{{{+1 시게미쓰 마모루}}}[br]重光葵 | Shigemitsu Mamoru''' }}}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moru_Shigemitsu_1936.jpg|width=100%]]}}} || ||<|2> '''출생''' ||[[1887년]] [[7월 29일]] ||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 ||<|2> '''사망''' ||[[1957년]] [[1월 26일]] (향년 69세) ||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시|| ||<|8> '''재임기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부총리 || ||1954년 12월 10일 ~ 1956년 12월 23일 || ||제61대 외무대신 || ||1943년 4월 ~ 1945년 4월 || ||제5대 대동아대신 || ||1945년 8월 17일 ~ 1945년 8월 25일 || ||제64대 외무대신 || ||1945년 8월 17일 ~ 1945년 9월 1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학력''' ||[[도쿄제국대학]] {{{-2 (독일법학 / 학사)}}} || || '''비고''' ||[[제2차 세계 대전]] [[극동국제군사재판]] '''[[전범#s-2|A급 전범]]'''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지옥이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 >[[사이판 전투|사이판 함락]] 소식을 들은 후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일본]]의 [[정치인]]이다. [[도조 히데키|도조]] 내각, [[고이소 구니아키|고이소]]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내각에서 외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대동아대신이기도 하다. == 생애 == 1887년 [[오이타현]]에서 출생했다. 오이타현 오노군 미에마치[* 現 오이타현 분고오노시]에서 오노 군수를 지내는 아버지 나오마사(直愿)와 어머니 마쓰코(松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정(시게미쓰 본가)에 아이가 없어 입양된 시게미쓰가 26대 당주가 되었다. 구제 기쓰키 중학교[* 現 오이타 현립 키츠키 고등학교], 제5고등학교를 거쳐서 1911년 [[도쿄제국대학]] 독일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에 합격한다. 이어서 외무부에서 관료 생활로 출세길에 올라 중국 공사가 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그것이 일본군의 조작임을 알고도 후원했으며 [[송호정전협정]]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휘말려서 오른쪽 다리를 부상당해서 나중에 절단하고 [[의족]] 신세를 지게 된다. 이후 미주리 호의 갑판에 오를 때도 다리를 전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시게미쓰 마모루는 [[외교부장관|외무대신]]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고, [[1944년]]에는 대동아대신을 겸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전권 대사로서 미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또한 미국 측이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자마자 맥아더와 그의 참모장이던 리차드 서덜랜드와 담판을 지어 미국의 점령 정책이 일본 정부를 활용한 간접 통치로 전환되는데 공을 세웠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일하게 영어로 재판에 대답 및 임했으며, 금고 7년형의 판결을 받아 A급 전범 중 유이하게 금고형을 받았다. 또 다른 한 명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조선계 일본인 [[외교관]]이다.]도 20년의 유기 금고형을 받았지만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공통점은 두 명 다 [[외교관]] 출신의 외무대신이었다는 점이다. 군인 출신 정치인들에 비해 외교관 출신 정치인들은 비교적 형이 가벼웠다. 예외가 있다면 [[히로타 고키]] 정도.] [[1950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형기를 마치지 않고 가석방되었다. 이어서 개진당 총재와 [[일본민주당(1954년)|일본민주당]] 부총재 등을 거쳐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1954년 12월 10일부터 1956년 12월 23일까지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지냈다. [[1957년]], 시게미쓰 마모루는 가석방된지 7년만에 사망하였다. == 기타 == === [[미주리(전함)|USS 미주리 함]] 함상 [[일본의 항복|항복]] 문서 조인식 === ||
[youtube(p7REAvk0iJQ)] || || 4분 38초에 시게미쓰 마모루가 서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 [[1945년]] [[9월 2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도쿄만에 정박한 [[미합중국 해군]] [[전함]] USS 미주리 함에서 이루어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일본대표로 참여하였다. 시게미쓰 마모루는 특유의 절뚝거리는 다리로 입장하여 항복 문서에 날인하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장면은 오랫동안 기록 영화에서 반복되어 사용됐으며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마모루가 장애로 인해 나타낸 모습은 현장의 연합군 대표들 및 지휘관들에게 '잔인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출처-"아메리칸 시저 : 맥아더 평전" 2권) 시게미쓰 마모루가 절뚝거리는 걸음을 걷게 된 이유는 바로 [[윤봉길]] 의사와 관련이 깊다. [[1932년]] [[4월 29일]], 시게미쓰 마모루는 [[중국]] [[상하이]] 천장절 축하연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폭탄 공격]]을 받았다. 그 후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고 의족을 착용해서 절뚝거리게 되었다. 위의 뉴스릴 영상 2분 10초경을 들어보면 '몇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윤봉길|Korean patriot]])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재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이다'라는 윤봉길 관련 언급이 나온다. 이 영상은 영화 암살에서 그대로 등장한다. === [[쿠릴 열도]]: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과 대화 === [[1956년]] [[8월 18일]],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런던에서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을 만났다. 그는 [[쿠릴 열도]]와 관련하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아래와 같이 발언했다. >“만약 일본이 2개 섬(쿠릴 열도)으로 만족한다면, 미국도 [[오키나와]](당시 미국의 신탁통치 중이었다)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547885.html|동북아 영토분쟁의 ‘숨은 손’은 미국]]] 이런 미국의 경고에 일본 정부는 ‘2개 섬 우선 반환론’에서 ‘4개 섬 일괄반환론’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러시아]]와 평화조약이 보류되었다. == [[롯데]]와의 연관설 ==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의 둘째 아내인 시게미쓰 하쓰코가 이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신격호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사위인 셈. 다만 이 설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 자세한 내용은 [[신격호]] 문서 참조. == 대중매체에서 ==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최훈이 연기했다. == 관련 문서 == * [[제2차 세계 대전]] * [[윤봉길]] * [[극동국제군사재판]] == 둘러보기 ==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