僧朗, 447-456 ~ 522~540 중국의 삼론종을 발전시킨 [[고구려]]의 [[승려]]. [[5세기]]에 고구려 [[요동성]]에서 태어났다. 승랑의 생몰년도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주위의 여러 저작들을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승랑의 탄생년도는 그가 태어난 곳에서 그의 스승인 법도(法度 437~500)의 탄생년도와 그가 요동을 떠난 시기(476년 전후)를 통하여 유추한 값이고, 사망연도 역시 각종 기록으로 유추해서 522~540년 (대략 530년대) 사이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 김성철 『승랑 –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2011 지식산업사 pp67~69, pp159~163 ] 또한 그에 행적에 대한 자료도 부족하여 그의 정확한 행적을 파악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삼론조사전집’등의 저서로 비추어서 그의 행적을 추측하여 한번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승랑이 성장할 당시, 고구려에는 [[불교]]가 막 퍼지기 시작했다. 372년([[소수림왕]] 2) [[남북조시대]] 직전인 (이 시대는 정확히는 [[5호16국시대]] 중후반기다.) 북중국의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 351~394)에서 온 순도 스님이 불상과 불교 경전을 전해 주었고, 순도 스님과 374년 고구려에 온 [[아도]] 스님을 위해 375년 소수림왕이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어주어 불교를 신앙하도록 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불교를 알게 된 것은 공식적인 불교 전래 이전인 4세기 초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5세기 초에도 여전히 불교는 널리 퍼지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나 이해도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비록 그가 태어난 요동성 일대가 고구려의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가 발전된 지역이었고, 그 또한 불교에 대한 이해능력이 뛰어나서 많은 불교 경전들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구려에서 배운 불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승랑은 더 넓고 깊게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다. 승랑은 마침내 30세 무렵인 대략 476년 즈음에 고향을 떠나 북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도시를 다니며 불교를 공부했다. 특히 [[시안(도시)|장안]](長安)에서 불교의 중요 이론인 [[반야]]사상과 [[화엄]]사상, 그리고 삼론의 이치를 담은 중도사상을 배웠고, 479년경 [[둔황]](敦煌)에 가서 담경(曇慶) 법사에게 삼론(三論)[* [[중관학파]]의 대표 경전들인 《중론》, 《십이문론》, 《백론》이 처음 중국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명칭이다.]을 배운 후 교화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많다. 그 어느 문헌에도 승랑의 스승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삼론조사전집을 둘러볼 때 승랑의 스승이 특정인이 아니고, ‘황룡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쿠마라지바|구마라습]] 문하 팔숙(八宿)의 제자에게 배운 제자에게 배움을 청하여 무의무소득의 대승법문을 터득한 뒤 강을 건너 [[양주]]에 왔다.’라고 기록한 점을 비추어 볼 때,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스승에게서 삼론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담경은 승랑이 가르침을 받던 시기와 생존연대가 비슷하고 그에게 영향을 준 바도 높기에 그의 스승 중 한명으로 추측된다. [* 김성철 『승랑 –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 2011 지식산업사 pp91~93] 당시 북중국의 서쪽 끝인 [[둔황]]은 장차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석굴사원이 한참 만들어지는 등 불교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었다. 둔황에서 삼론학을 배운 승랑은 삼론종을 중심으로 자신의 공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484년 이전에 승랑은 둔황을 떠나 불교가 번성하던 남북조 중 남조의 [[제(육조)|남제]]의 수도 [[건강]](建康, [[난징]])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그곳에서부터 차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공부한 삼론학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종산(鍾山)에 있는 초당사(草堂寺)에서 주옹(周顒)이란 [[선비]]가 승랑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간절히 청을 했다. 승랑은 그에게 삼론학을 가르쳐 주었고, 주옹은 승랑에게 배운 바를 [[삼종론]](三宗論)이라는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주옹의 노력 덕분에 승랑의 업적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승랑의 마지막 행적은 섭산의 서하사가 중창되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주지를 맡으며 오래 머무르게 되어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하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측된다. [[분류:고구려의 승려]] [[분류:중국의 승려]] [[분류:남북조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