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승계련}}}'''[br]'''承啓璉'''}}}}}}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승계련.jpg|width=100%]]}}} || || '''자 / 호''' ||계련(啓璉) / 만송(晩松) || || '''본관''' ||[[승(성씨)|연일 승씨]][* 대촌파(大村派)-정문공파(旌門公派) 28세 현(鉉) 항렬. 족보명은 승상현(承商鉉).] || ||<|2> '''출생''' ||[[1899년]] [[1월 3일]] ||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 [[승(성씨)|연일 승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승병일]]·[[승영제]]·[[승영호]]·[[승준현]]·[[승진(독립운동가)|승진]]·[[승치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br](현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 ||<|2> '''사망''' ||[[1961년]] [[7월 16일]]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해방촌]] || || '''종교''' ||[[천도교]]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41호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99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리(현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처인(承處仁)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의사(金義師)의 딸 사이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정주군 지역에 흉년이 들자 소 한 필과 논·밭을 팔아 [[만주]]에서 [[잡곡]] 한 트럭을 들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등 빈민들을 구조하는 데에 힘썼으며, 평소에도 연일 승씨 문중 및 주변의 고학생들의 학비를 대주는 등 명망이 있었다. 1920년 7월 중순 정주군 신안면 자택에서 [[만주]] 독립운동단체 광한단(光韓團) 단원인 [[김관성]]·박민희(朴敏熙)·이명환(李明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 700원을 제공하였다. 1922년에는 가산을 털어 [[남강 이승훈]]을 도와 [[오산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여 11월부터 설립자 겸 재단이사를 지냈으며, 1925년 1월에는 재단법인 오산학교의 감사에 선임되어 이후 20여 년 간 역임했다. 1928년에는 [[강우규]] 의사의 장남 강중건(姜重建)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거지로 변장하고서 찾아와 만주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줄 것을 청하자, 자신의 논밭 15마지기를 팔아 송금해주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같은 해 11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치되었다가, 이후 정주지방법원 검사분국에서 기소중지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1년 정주군 아이포면에 있는 대산농민사(大山農民社)에 회장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204002392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2-04&officeId=00023&pageNo=3&printNo=3626&publishType=00020|취임하였으며]] 이후에는 [[천도교]]의 농민조직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1948년 5월, 4남 2녀[* 연일승씨대동보 대촌파-정문공파 340쪽에는 승영무(承永武)·승영식(承永軾)·승영빈(承永斌)·승영진(承永振)·승영태(承永泰) 등 5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의 자식들을 비롯한 일곱 식구를 이끌고 월남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해방촌]]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가난으로 [[손수레]]를 끌고 다니고 [[뻥튀기]] 장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으며, 1950년 [[6.25 전쟁]] 때는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시]]로 피난하였고 그곳에서 거리에 [[토정비결]]을 봐주는 노점을 차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61년 7월 16일 별세했는데, 별세 직전에는 100환 어치의 약을 살 돈도 없었을 정도로 빈곤했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72000329102004&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1-07-20&officeId=00032&pageNo=2&printNo=4776&publishType=00010|#]]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012년 6월 29일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 여담 == * 장녀 승영숙(承永淑)은 [[수도여자고등학교]] 재학 중에 학비를 낼 길이 없어 졸업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했는데, 승계련 사후 [[조선일보]]에 승계련의 유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가 나간 뒤 학교 측에서 납입금을 전액 부담하기로 하고 졸업장을 내주었다. * 차남 승영식(承永軾)은 [[대한민국 육군본부]] 수송대에 입대하여 복무 중이었는데, 승계련 사후 생계 곤란을 이유로 제대 여부 심사가 이뤄져 결국 특별히 제대가 이뤄졌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4280023920302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2-04-28&officeId=00023&pageNo=3&printNo=12590&publishType=00020|#]]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1899년 출생]][[분류:1961년 사망]][[분류:정주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승씨]][[분류:일제강점기의 천도교 신자]][[분류:건국포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희귀성씨인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