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네덜란드의 행정 구역)] ||<-6>|| ||<-6>|| ||<-6>|| ||<-6><:>{{{#ffffff {{{+4 ''''s-Hertogenbosch'''}}}[br]스헤르토헨보스 }}}|| ||<-1><:>{{{#FFFFFF '''국가'''}}}||<-5>[[네덜란드]]|| ||<-1><:>{{{#FFFFFF '''주'''}}}||<-5>[[노르트브라반트]]|| ||<-1><:>{{{#FFFFFF '''면적'''}}}||<-5>117.81km²|| ||<-1><:>{{{#FFFFFF '''인구'''}}}||<-5>154,205명[* 통계인구, 2019년 1월 기준.]|| ||<-1><:>{{{#FFFFFF '''시장'''}}}||<-5>잭 미커스(Jack Mikkers) ('''[[자유민주국민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6400; font-size: .9em" {{{#ffffff '''자유민주국민당'''}}}}}}]]''')|| ||<-1><:>{{{#FFFFFF '''시간대'''}}}||<-4>UTC+01:00([[서머타임]] 적용)|| ||<-6><:>[[http://s-hertogenbosch.nl/|스헤르토헨보스 행정 사이트]]|| ||<-6>{{{#!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스헤르토겐보스,너비=100%,높이=300px)]}}}|| [목차] [clearfix] == 개요 == '''스헤르토헨보스'''는 [[네덜란드]]의 도시로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주도다. 네덜란드 내에서도 드물게 표기법이 ''s-Hertogenbosch'로 독특한데, 발음하기 어렵고 길다 보니 대부분은 '덴보스'라고도 부른다 한다. == 역사 == 이 스헤르토헨보스라는 길고 발음하기 어려운 도시 이름의 유래는 [[12세기]] 말 도시의 탄생 설화와 이어진다. 이 스헤르토헨보스는 "공작의 숲"이라는 옛 표현 "des Hertogen bosch"의 줄임말인데 이 도시의 이름에서 지칭하는 공작은 바로 [[브라반트 공국]]의 공작 헨리 1세. 헨리 1세의 가문은 예로부터 - 적어도 8-9세기 즈음부터 - 이 도시가 세워질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헨리 1세가 늪지대에 둘러싸인 숲 지역에 도시를 세우면서 스헤르토헨보스의 역사가 시작되고 도시 이름이 이와 같은 것도 이것이 이유다. 헨리 1세가 세운 이 도시는 헨리 1세가 26세가 되었을 무렵 도시로서의 권리가 주어졌으며 [[1185년]] 무역권을 얻었다. 다만 위의 설화와는 모순되게도 스헤르토헨보스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196년]]이다. 이는 스헤르토헨보스의 도시 헌장은 사라졌기 때문. 헨리 1세가 이 도시를 세운 이유는 [[홀란드 공국]]을 비롯한 다른 공국들로부터 해당 지역을 방어하고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서라 여겨지며 이의 연장선상으로 [[1203년]] 도시 성벽을 세운다. 이 성벽은 후술하듯 오랜 기간을 거쳐 개선되고 파괴되는 등 사건사고들을 겪지만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스헤르토헨보스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남아있다. 14세기 들어서는 도심 지역이 확장되어 도시의 벽들도 확장되었으며 스헤르토헨보스도 당시 네덜란드 지역의 북방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 시기 예술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인데 보스가 13살 무렵 목격한 [[1463년]] 도시의 대형 화재는 보스의 대표작들에 영감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1520년]]까지 스헤르토헨보스는 번영하여 당시 (현) [[네덜란드]] 지역에서 [[위트레흐트]] 다음으로 가장 인구가 많았던 도시였다. 하지만 스헤로트헨보스의 번영은 이후 찾아온 전화로 인해 끝나게 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독립된 주교령이었던 스헤르토헨보스는 [[합스부르크]] 세력에 가담하여 칼뱅주의 반란을 진압, [[네덜란드 공화국]]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으로 도시의 긴 전쟁기가 시작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휴전이 끝나고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1629년]] 도시는 네덜란드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나 독립전쟁 당시 가톨릭 합스부르크 편을 들었던 스헤르토헨보스의 가톨릭 인구와 "브라반트인"들은 추후 암암리의 차별을 받게 된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평화가 맺어진 후에는 도시는 계속해서 방어 시설을 확장해 나갔으나 [[1794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점령되고 이후 [[바타비아 공화국]]의 일부로, 그 다음에는 [[프랑스 제1제국]]에 넘어갔다 [[1814년]] 프로이센에 점령당한다. 2세기의 전쟁 기간 동안 [[1526년]] 18,571명이었던 인구는 바닥을 찍은 [[1665년]]에는 9,000명까지 추락하게 된다. [[1815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설립된 이후 스헤르토헨부스는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주도가 되었으며 산업화 및 재건이 이루어져 경제발전의 수혜를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보수적인 시정은 [[1878년]]까지 역사적인 성벽 밖으로 도심의 확장을 제한하여 주거난을 겪고 당시 네덜란드에서 영아사망률이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했었고. 또한 보수정부가 [[사회주의|도시에 위협적인 노동자 활동]] 저지를 위해 노동자들을 불러올 산업화와 인텔리를 불러올 고등교육 시설 건설을 막았고 이는 스헤르토헨보스가 네덜란드 내에 중요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1940년]] 독일군에 점령되어 도시 외곽에 스헤르토헨보스 강제수용소가 세워져 약 30,000명의 수용수들이 감금되었다. 그 중 유대인들은 12,000명. 그러다 [[1944년]] 영국군에 의해 해방된다. 전후 네덜란드의 여타 다른 도시들처럼 급진적인 재건을 겪어 도시의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도시 개발을 위해 쓸려나가고 도시의 유명한 성벽도 이 시기 큰 훼손을 당한다. 그 예시로 [[1956년]]에는, 스헤르토헨보스에 남아 있는 네덜란드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벽돌 건물인 '모리안'을 도시 정부가 철거하여 도로를 건설하러 시도하고 이는 큰 반발을 낳은 끝에 무산된다. [[1963년]] 즈음부터 사적지 보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오늘날에는 도시의 성벽을 비롯한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도시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 지리 == 도시 북쪽으로는 [[뫼즈 강]]이 흐르며 뫼즈 강에 맞닿아 있지는 않지만 도시의 운하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고 있다. 기후로는 [[서안 해양성 기후]]를 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강세를 띄어 무신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사실상 양분하고 있다. == 기타 == 현지에서 도시 이름을 스헤르토헨보스라고 풀네임으로 말하고 다니면 십중팔구 외지인인 줄 안다. 현지인들 거의 대부분은 공식명칭이 아닌 덴보스라고 부르기 때문.[* 우리나라에서 '한국'이나 '우리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면 공식 석상이 아닌 이상 어색한 거랑 같은 이치다. 한국에는 지명이 긴 경우가 별로 없어서 사례가 적지만, [[부산진구]]에서 [[진구]]라고 줄여쓰냐 마느냐가 외지인 판독기인 경우가 있다.] [[덴 하흐]]의 원래 이름도 '스흐라펀하허(s-Gravenhage)'라는 이름이 있지만 덴보스와는 달리 '덴하흐'가 정식 명칭이 되어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른다. 여담이지만, KBS 취재진이 여기서 일어난 폭력시위에 대해 보도를 하면서 도시 이름을 '헤르토헨보스'로 s를 묵음처리하는것으로 착각하여 오타를 내었다. 네덜란드 축구 2부리그 [[에이르스터 디비시]] 참가 구단인 [[FC 덴보스]]의 연고지이다. [[분류:네덜란드의 도시]][[분류:노르트브라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