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종교개혁 주요 사건)] * [[독일어]]: '''Schmalkaldischer Krieg''' [목차] == 개요 == 16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벌어진 종교전쟁. 좁게는 1546년에서 1547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는 슈말칼덴 동맹이 결성된 1531년부터 1552년 파사우 조약까지를 포함하기도 한다. == 내용 == === 슈말칼덴 동맹 결성과 전쟁 === 1531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교회]]를 지지하는 영주(제후)와 자치도시들이 [[구교]]의 윤리를 내세워 신교도를 박해하고 폭정을 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반발하여 군사 동맹 성격의 '''슈말칼덴 동맹'''을 맺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가 3년 전에 개신교를 인정했던 약속을 모두 뒤엎고, 신교도를 관용없이 탄압하겠다고 선언한데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신교파와 구교파로 분열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침공 등으로 해외 정세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슈말칼덴 동맹 체결 직후 당장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은 군사적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발생한 전쟁이 모두 끝나자 1546년 카를 5세는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진주했다. 그러나 신교도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교도 연합군의 지휘 체계와 규율은 매우 어수선했다. 그래서 신교군은 한번에 연합된 군대를 편성하지 못했고, 카를 5세는 각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쳐들어가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해갔다. 대부분의 개신교 제후들을 제압한 카를 5세는 개신교파 최대 제후이자 구심점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작센 선제후국]]으로 쳐들어갔고 마침내 1547년 4월 24일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뮐베르크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뮐베르크 전투에서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개신교 세력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Interim)를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일하여 제정한 교리를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내용적으로 사실상 가톨릭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후속전 === 그러나 전쟁 승리 이후 카를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을 내려 개신교도들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했고 신교도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졌다. 게다가 카를 5세의 독선적인 통치 방식으로 구교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었다. 또한 카를 5세가 1531년 차기 황제인 [[독일왕]]으로 선출된 동생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를 내치고 자신의 장남인 [[펠리페 2세|펠리페 왕자]]를 차기 황제로 앉히려 하자 페르디난트 1세를 따르던 가톨릭 제후들의 민심까지 이반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장인인 헤센 방백 [[필리프 1세(헤센)|필리프]]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분개한 작센 선제후 [[모리츠(작센)|모리츠]]는 개신교 제후들을 재결집한 후 비밀리에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었다. 1552년 1월 마침내 반합스부르크 연합은 군사를 일으켜 남부 독일 일대를 장악했다. 5월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군은 [[오스트리아 대공국]] [[인스브루크]]에 머물던 황제를 공격했고, 카를 5세는 간신히 도망쳐 직접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며 탈출했다. 카를 5세는 알프스 산맥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최남단의 필라흐에 머물면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았으나, 구교파 최대 제후국인 바이에른 공국 뿐만 아니라 동생 페르디난트 1세까지 형의 명령을 거부하여 황제의 복수전은 무산되었다. === 결과와 영향 ===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교 제후들의 의견을 모아 1552년 모리츠가 이끄는 신교도 제후들과 파사우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제국 내 신교와 구교간에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어 신교와 구교 양측은 종교적 평화를 영구화하기 위한 추가적인 조치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에 파사우 조약의 합의 내용을 보완하여 1555년 역사적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이에 개신교측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독일 내에서 종교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한편 고향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은거해 있던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체결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결국 조약이 체결되자 충격을 받아 이듬해 퇴위를 선언하고 [[스페인]]의 유스테 수도원에서 은둔한 채 여생을 보냈다. 한편 앙리 2세는 이 전쟁에서 모리츠가 이끄는 개신교 제후들을 지원한 대가로 [[로렌]]에 있는 세 개의 주교령인 [[베르됭|비르텐]], [[메스(프랑스)|메스]], [[툴(프랑스)|툴]] 주교령을 프랑스 왕국에 병합했다. 비르텐은 [[프랑스어]]로 읽으면 [[베르됭]]인데 옛날 그 [[베르됭 조약]]의 장소이자 후대 [[베르됭 전투]]가 벌어진 장소로 이로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870년 [[메르센 조약]] 이래 거의 내내 [[독일어권]] 국가의 영토였던 [[알자스-로렌]]에 [[프랑스 왕국|프랑스]]가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 == 기타 == 현대 유럽의 [[루터교회]]에서 [[성상(조형물)|성상]]이 상당수 남은 것이 이 전쟁과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화의>로 인한 결과라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생전에도 성상을 아디아포라의 영역으로 보았고,[* 십계명의 우상숭배 금지 계명이 신약 시대 이후 무효화되었다고 보았다.] 개혁파나 츠비카우파 마냥 폭력적으로 깨부수는 것은 '연약한 신자'들을 실족시킬 수 있으니 자제하라고 한 적도 있어서 꼭 슈말칼덴 전쟁의 영향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분류:신성 로마 제국]] [[분류:종교 개혁/전쟁]] [[분류:내전]] [[분류:16세기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