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장쑤성의 행정구역)] [[파일:쉬저우 중국.jpg]] 쉬저우 시가지. 중앙은 전파탑 ||<-3> [[파일:중국 국기.svg|height=20]] {{{#000,#ddd '''[[중국|{{{#000,#ddd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000,#ddd 장쑤성}}}]]의 [[지급시|{{{#000,#ddd 지급시}}}]]'''}}} || ||<-3> {{{#ff0 '''{{{+1 [ruby(徐州, ruby=Xúzhōu)][ruby(市, ruby=Shì)]}}}'''[br]쉬저우시 | Xuzhou City}}} || ||<-3> [include(틀:지도, 장소=徐州市, 너비=100%, 높이=100%)] || ||<-2> '''{{{#ffff00 시정부 소재지}}}''' || [[장쑤성]] 쉬저우시 윈룽구 쿤룬다다오1호[br]江苏省徐州市云龙区昆仑大道1号 || ||<-2> '''{{{#ffff00 지역}}}''' || [[화둥]] || ||<-2> '''{{{#ffff00 면적}}}''' || 11,259km² || ||<-2> '''{{{#ffff00 하위 행정구역}}}''' || 5구 3현 4현급시 || ||<-2> '''{{{#ffff00 시간대}}}''' || UTC+8 || ||<-3> '''{{{#ffff00 인문 환경}}}''' || ||<-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2> '''{{{#ffff00 인구}}}''' || 9,083,790명 ^^(2018)^^ || ||<-2> '''{{{#ffff00 인구밀도}}}''' || 807명/km² || ||<-2> '''{{{#ffff00 HDI}}}''' || 0.776 ^^(2016)^^ || ||<-2> '''{{{#ffff00 서기}}}''' || 쑹러웨이(宋乐伟) || ||<-2> '''{{{#ffff00 시장}}}''' || 왕젠펑(王剑锋) || ||<|2> '''{{{#ffff00 GRDP}}}''' || '''{{{#ffff00 전체}}}''' || $1,276억 8,070만 ^^(2020)^^ || || '''{{{#ffff00 1인당}}}''' || $14,056 ^^(2020)^^ || ||<|2> '''{{{#ffff00 상징}}}''' || '''{{{#ffff00 시화}}}''' || [[배롱꽃]] || || '''{{{#ffff00 시목}}}''' || [[은행나무]] || ||<-2> '''{{{#ffff00 차량번호}}}''' || '''苏C''' || ||<-2> '''{{{#ffff00 행정구역 약칭}}}''' || '''苏''' || ||<-2> '''{{{#ffff00 행정구역코드}}}''' || '''32'''0300 || ||<-2> '''{{{#ffff00 지역전화번호}}}''' || '''516''' || ||<-2> '''{{{#ffff00 우편번호}}}''' || '''221000''' || ||<-2> '''[[ISO 3166-2|{{{#ffff00 ISO 3166-2}}}]]''' || '''CN-JS-03''' ||}}}}}}}}} || ||<-3> [[http://www.xz.gov.cn/|홈페이지]] || [[파일:쉬저우 중국 1.jpg|width=450]] 윈룽 호수에서 바라본 시가지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장쑤성]] 북서부에 위치한 [[지급시]]이다. [[회하]] 이북에 위치하고, 면적 11,765㎢, 인구는 2018년 기준 880만명 (이 중 시구[* 현급 단위에 '구'로 편성된 지급시의 중심 시가지 지역. 중국의 지급시는 현도 인구가 100만명을 넘는 곳이 많고 현의 중심지 또한 수십만의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실제 도시화 인구는 훨씬 많다.] 335만명)으로 장쑤성 내에서는 [[쑤저우시]]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허난, 산둥, 안후이, 장쑤성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와 [[국공내전]] 등 역사상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쑤저우]]와 표기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되는 일도 있다. [[춘추전국시대]], [[초한전쟁|초한쟁패기]],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금나라]]와 [[몽골 제국]]이 침공, 원명 교체기 등 전근대 시기 남중국과 북중국 세력 간에 수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운하와 [[황허]], [[화이허]], [[장강]]의 범람으로 많은 홍수와 기근을 겪었다. 그럼에도 수운 교통의 중심이었기에 꾸역꾸역 재건되었으며, 명대에는 운하의 선박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들끓었다. 20세기 들어서는 [[중일전쟁]] 시에 격전지였고, [[국공내전]] 때에도 화이하이 전역이 벌어지는 등 현대사 시기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따라서 역사가 유구한 도시임에도 시내 지상에는 옛 흔적이 별로 없다. 다만 쉬저우 박물관에 가면 엄청난 규모의 한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그외에 화이하이 전역 기념관이 있으며, 운룡산 흥화사 등의 고적이 남아있다. == 지리 == [[파일:팽성.png|width=70%]] 지리적으로는 [[장쑤성]] 북서쪽 거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강]] 이남의 [[난징]]ㆍ[[쑤저우시(장쑤성)|쑤저우(苏州)]]에서 멀 뿐만 아니라 장쑤성의 다른 도시보다 [[산둥성]] [[지닝시]], [[짜오좡시]]나 [[안후이성]] [[화이베이시]], [[쑤저우시(안후이성)|쑤저우(宿州)]]시 등이 더 가깝다. 특히 장쑤성이 지도상으로는 옛 [[서주(중국)|서주]]를 베이스로 하되 강남의 쑤저우ㆍ난징 등 일부가 포함된 형태이지만, 현대로 올수록 영역상으로는 강북의 옛 서주에 비해 훨씬 작은 강남 지역이 점점 잘 나가게 되어 장쑤성 하면 대표적으로 연상되는 곳들은 강남 지역이나, [[양저우]]처럼 강북이라도 간발의 차이로 강북일 뿐 당연히 장강 하류에 포함되는 곳들이 대다수이고, 그 너머의 중원과 가깝고 장강과는 제법 먼 강북 지역은 다소 묻힌 감이 있다. 특히 이 곳 쉬저우시는 이름부터가 그 서주(=쉬저우)로서 당연히 옛 서주의 중심지였는데도 영역상으로 서주의 후신 격인 장쑤성에서는 강남 지역에 밀려서 존재감이 생각보다 약하다.(...) 어쨌든 시내에는 [[황하]]가 12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 유로가 바뀌었을 시기의 옛 본류가 남아 있다. == 역사 == [[파일:중국 병마용 한대.jpg|width=700]] [[파일:한대 병마용 중국.jpg|width=700]] 한대 초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병마용 상고시대에는 상 시대엔 팽나라가 있었고 [[쉬저우]] 시대엔 [[서나라]]의 영역이었으며, [[춘추시대]]에 들어와 서나라가 [[오(춘추시대)|오나라]]에 복속되면서 중원의 세력권에 편입된다. 고대 9주에서는 [[쉬저우#s-2]]에 속했다. [[전국시대]]에는 [[초한전쟁|초한쟁패기]] [[항우]]의 근거지로 익숙한 [[팽성]](彭城)으로도 불렸다. 한편 [[고제(전한)|유방]]의 출신지인 패현 풍읍 중양리(沛縣豐邑中陽里)도 시 북서부의 펑현 중심지에 있다. 현재 팽성과 중양리는 각각 쉬저우시 중심지(펑청 가도)와 펑현 중심지(중양리)에 각각 행정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는 자사 [[도겸]]이 [[조조]]의 부친 [[조숭]]의 죽음을 막지 못하여 조조의 침공을 받았으나 [[유비]]의 도움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도겸의 사후 유비가 쉬저우 자사가 되었으나 휘하의 [[여포]]에게 빼앗겼고, 여포는 다시 조조에게 패하였다. 쉬저우를 정복한 조조는 [[하비]]에 치소로 두었으나, [[위문제]]가 팽성으로 옮겼다. [[5호 16국]] 시대 현지 주민들은 남쪽 회남 방면으로 피난하였고, 그중 팽성 출신의 유씨가 두각을 드러내어 [[유송]]을 건국하기도 하였다. 408년 쉬저우를 수복한 [[송무제]]는 이를 북쉬저우와 쉬저우로 나누었고, 기존 팽성은 전자의 수도였다. 다만 10여년 후 북쉬저우는 쉬저우로, 쉬저우는 남쉬저우로 개칭되었다. 이후 팽성현은 명대 초엽까지 계속 쉬저우의 중심으로 남았다. [[당나라]] 들어 안정을 되찾은 쉬저우는 번영하였고, 639년의 2만에서 742년 20만으로 한세기 만에 인구가 10배 증거하였다. 781년에는 당에 반기를 든 평로 번진의 고구려계 절도사 [[이납]]이 쉬저우를 공격하였고, 819년 당에게 토벌될 때까지 대운하가 불안정을 겪으며 일대는 침체를 겪었다. === 연이은 혼란 === [[파일:중국 쉬저우.jpg]] 송대부터 세워진 운롱산 싱화사 (운룡산 흥화사) 8세기 말엽 쉬저우에는 무녕 (武寧) 절도사가 설치되었다. 다만 832년부터 병사들이 불복하기 시작하였고 849년, 859년, 862년에는 군란이 일어나 두 절도사가 축출되었다. 이후 부임한 왕식은 주동자를 처형하고 나머지를 해산하며 반란을 잠재웠는데, 해산된 이들이 도적떼가 되며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864년 사면을 내리며 재입대하는 자에 대해 일정 기간의 복무 후 북방의 더 나은 진영으로 배치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3천명이 응하였지만, 계속 무녕에 머물자 서약을 어겼다고 여겨 868년 [[방훈]]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의 농민들 역시 반군에 가담하여 함께 팽성을 점령하였고, 수탈을 일삼던 장교들을 학살하였다. 다만 869년 반란은 진압되었고, 무녕은 위문의 의미인 감화 (感化)로 개칭되었다. 한편 그 무렵 [[황허]]가 인근 [[화이허]] 방면으로 진로를 옮기며 쉬저우는 자주 홍수에 시달렸고, 송대에 쉬저우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1129년 쉬저우는 27일의 저항 끝에 [[금나라]]에 점령되었고, 항복을 거부한 자사 왕복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조립이 남은 병력과 함께 저항하여 두 달 후 도시를 회복하였다. 다만 그 역시 전략적으로 후퇴하였고, 쉬저우는 금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1232년 [[몽골 제국]]에 의한 금의 멸망이 가시화되자 장군 왕우와 --여포-- 봉선이 반란을 일으켜 자사 툭탄을 축출하였고, 한족 장수 안용이 이끄는 몽골군이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이에 남쪽 숙주 (宿州)의 장군 유안국과 비주 (하비)의 두정이 항복하였다. 다만 몽골인 장수 아수루가 그를 시기해 죽이려 하자 안용은 금나라로 전향하였다. 1233년 11월 몽골군이 재차 쉬저우를 점령했으나 얼마후 떠나자 안용은 이번에는 [[남송]]의 편에서 쉬저우를 장악하였다. 이에 1234년 봄 장영이 이끄는 몽골군이 공격해오자, 패전한 안용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1262년에는 몽골측 쉬저우와 비주[* 합비 (피저우)] 총독 이고가가 송에 투항하려다 실패하고 며칠 후 살해되었다. [[원나라]] 말기인 1358년 8월 쉬저우는 [[홍건적]]에게 점령되었다. 원의 [[토곤 테무르]]는 항복 시 사면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봄 [[토크토아]]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1349년 가을 쉬저우는 점령되었고, 몽골군은 다수의 주민을 학살하였다.--[[서주대학살]] 시즌2-- 이후 쉬저우는 869년의 경우처럼 '무력으로 안정시키다'라는 의미인 무안 (武安)으로 개칭되었다. 1360년 한족 군벌 [[장사성]]이 쉬저우를 취하였으나 다시 1366년 [[주원장]]의 장군 [[서달]]이 점령하였다. 원의 [[코케 테무르]]는 재차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나 [[명나라]]의 장군 부우덕에게 격파되어 다수가 익사하였고, 살아남은 수백의 군마는 포로가 되었다. 10여년의 혼란을 겪은 후 명대의 안정기에 쉬저우는 [[대운하]]의 수운을 바탕으로 번영하였고, 그 세관에 해당하는 초관 (鈔關)이 설치된 7개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 다만 남쪽의 쉬저우홍 (徐州洪)과 여량홍 (呂梁洪) 등의 도적떼가 선단을 약탈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쉬저우위, 쉬저우좌위, 비주위의 세 부대를 설치해 운하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나 도적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 들어 명조의 쇠퇴를 틈타 도적떼가 들끓자 조정에서는 기존 운하에 평행하는 계운하를 신설하여 위험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기존 관개 시설이 교란되고 홍수가 잦아졌고, 특히 1624년의 대홍수 시에는 도심이 4m 아래의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명청 교체기에 쉬저우는 [[홍광제]] 정권이 청군의 [[장강]] 도하 저지를 위해 설치한 강북사진 (江北四鎮) 중 하나였다. [[남명]]의 병부상서 사가법은 기존 도적떼 두목 고걸에게 수비를 맡겼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암살되었고, 후임인 이성동은 청군이 남하하자 도주해버렸다. (1645년 여름) 따라서 [[청나라]] 장수 [[아이신기오로 도도|도도]] ([[누르하치]]의 15남)가 무혈입성하였고, 얼마후 사가법은 [[양저우]]에서 결사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청대에도 쉬저우는 대운하의 초관 도시로 번영하였다. 다만 1688년에 대지진이 벌어져 많은 이가 사망하고 시내의 주택 중 절반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 20세기의 전란 === [[파일:일본군 중국 서주.jpg]] 1938년 5월 쉬저우에 진주한 일본군 1850년대에는 장강이 수로를 북쪽 산동 방면으로 트는 과정에서 연이은 홍수와 그로 인한 기근을 초래하였고, 쉬저우의 수로 대부분이 무력화되었다. [[신해혁명]] 후에는 [[장쉰]]이 잔병과 함께 쉬저우로 도주하여 1911년 12월 5일에 입성하였다. 난징정부의 3차례 토벌 끝에 장쉰은 1912년 2월 북쪽으로 패주하였다. 다만 1913년 [[계축전쟁]] (2차 혁명) 당시 북진에 나선 혁명군은 패하였고, 7월 24일 [[북양정부]]가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그후 장쉰이 돌아와 재차 거점으로 삼았고, 1917년 6월 [[베이징]]으로 진격해 [[장훈복벽]]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축출되었다. 남겨진 쉬저우 수비대는 폭동을 일으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후 쉬저우는 직예 군벌의 수중에 남아있다가 1924년 가을 [[2차 직봉전쟁]] 당시 3만 병력과 진군한 [[장쭝창]]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반격에 나선 [[쑨촨팡]]은 1925년 11월 8일 쉬저우를 자악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2차 북벌]] 시인 1927년 6월 17일 [[장제스]]가 입성하였다. 하지만 쑨촨팡과 장쭝창이 연합하여 반격, 6월 24일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이는 강남 여론의 분노로 이어졌고, 장제스의 첫 사임으로 이어졌다. 반격에 나선 국민당군은 12월 16일 쉬저우를 수복하였고, 이듬해 북벌을 완수하였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60만의 중국군과 24만의 일본군 사이에 쉬저우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 각각 10만, 3만의 전사자가 발생한 후 1938년 5월 19일 장제스는 쉬저우 포기를 지시하였다. 다만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은 실패하였고, 살아남은 중국군은 [[우한]]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난징에서 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쉬저우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쉬저우 대학살]] 시즌3-- 1945년 종전 후 9월 6일 국민당 군이 진주하였고, 쉬저우수성공서 (徐州綏靖公署)가 설치되었다. 한편 군법 재판으로 25명의 일본군이 처형되었다. [[국공내전]]기인 1948년 6월 6일에는 국민당 측의 초비총사령부(剿匪總司令部)가 설립되었다. 이어진 화이하이전역 (淮海戰役)은 국공내전의 3대 전장 중 하나였고,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1948년 12월 1일 [[인민해방군]]이 쉬저우에 입성하였고, 그 여파로 국민당은 장강 이북에서 공산당을 저지할 모든 여력을 상실하고 [[국부천대]]에 나선다. == 교통 == 시내 교통으로는 [[쉬저우 지하철]]이 있으며, 현재 1~3호선이 운행중이다. 장거리 철도는 도심 쉬저우역에서 기존 [[징후철도]]([[베이징]]-[[상하이]])와 룽하이철도([[롄윈강]]-[[란저우]])를, 외곽 [[쉬저우동역]]에서 [[징후고속철도]]와 쉬란고속철도(쉬저우-란저우)를 탈 수 있다. 공항은 시내 동남쪽에 위치한 쉬저우관인국제공항(IATA: XUZ)을 사용할 수 있다. 이전 2015년에 [[제주항공]]에서 [[인천국제공항]] 발 정기편을 취항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운항하지 않는다. [[분류:장쑤성의 지급시]][[분류:중국의 옛 수도]][[분류:중국의 도시]][[분류:대운하]][[분류:삼국지/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