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명 황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명 제16대 황제[br]{{{+1 의종 열황제 | 毅宗 烈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ng_Chongzhen.jpg|width=100%]]}}} || ||<|2> '''출생''' ||[[1611년]] [[2월 6일]] || ||북직례 순천부 [[자금성]] [br] (現 베이징) || ||<|2> '''사망''' ||[[1644년]] [[4월 25일]] (향년 33세) || ||북직례 순천부 자금성 만세산 [br] (現 [[베이징]] 서성구 경산공원) || || '''능묘''' ||[[사릉]](思陵) || ||<|2> '''재위기간''' ||'''{{{#670000 제16대 황제}}}''' || ||[[1627년]] [[10월 2일]] ~ [[1644년]] [[4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주(성씨)|주(朱)]] || || '''휘''' ||유검(由檢) || || '''부모''' ||부황 [[태창제|광종 정황제]][br]모후 효순황후(孝純皇后) || || '''황후''' ||장렬민황후(莊烈愍皇后)[* 혹은 효절열황후 주씨(孝節烈皇后 周氏)라고도 한다.] || ||<|4> '''묘호''' ||[[남명]] || ||사종(思宗) → [[의종]](毅宗) → [[위종]](威宗)[* 사종, 의종, 위종 3개는 남명에서 추숭했다. 21세기 현재 청나라가 추숭한 회종보다 의종이 주로 쓰인다.] || ||[[청나라|청조]] || ||[[회종]](懷宗) || ||<|4> '''시호''' ||남명 || ||소천역도강명각검규문분무돈인무효열황제[br](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 || ||청조 || ||장렬민황제[br](莊烈愍皇帝) || || '''연호''' ||[[숭정]](崇禎, [[1628년]] ~ [[1644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1655902969712.jpg]]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이자 사실상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이후 사촌형 [[주유숭]]이 추대되어 [[남명]] 정권이 들어서고 [[대만]]의 정씨 [[동녕 왕국]]과 연합하여 명나라 부흥운동을 이어갔지만, 조직력이 분열되어 서로 중구난방으로 황제를 칭한 데다가 남명의 수뇌부가 하나같이 무능하여 [[남송]]처럼 오랫동안 독자적인 제국을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남명 정권은 후세에도 정통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숭정제가 사실상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통한다.] 망국의 황제임에도 비교적 평가가 좋은 특이한 사례이다.[* 명나라는 [[명 4대 암군]] 때문에 이미 오늘내일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신종 [[만력제]]의 막장 행각과 희종 [[천계제]]의 무능으로 말 그대로 막장이 된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위충현을 위시한 부패한 [[환관]]들과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고, 동북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명나라는 [[청나라]]의 침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숭정제는 [[자금성]]에서 [[자살|자진]][* 자금성 뒤쪽에 위치한 '경산'(景山)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었다는 기록도 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만큼은 후대에 널리 인정받아서 망국의 황제임에도 불구하고 호평받기도 한다. 휘는 유검(由檢). 광종 [[태창제]] 주상락의 5남으로 희종 [[천계제]]의 이복[[동생]]이었다. 대명제국 멸망 이후 [[청나라]]는 '''[[회종]]'''이라는 [[묘호]]를, 남명 정권은 '''사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가 이후 '''[[의종#s-2]]''', '''위종'''이라는 묘호를 올려 총 4개의 묘호를 받았다. 이 중 남명 정권에서는 의종이라는 묘호를 최종적으로 승인했고, 오늘날에도 청나라에서 추숭한 회종보다도 의종이라는 묘호가 널리 쓰인다. 다만 [[중국 대륙]]에서는 명사종이라고 부르고, [[베트남]]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의종이라는 표기는 주로 [[일본]]에서 쓰였으며 [[한국]]에서도 그대로 부른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숭정제'라고 통일해 부르는 경향이 있다. === 가족관계 === 숭정제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회은왕 주자훤, 도회왕 주자찬, 도령왕 주자환, 도량왕은 요절했고, 정왕 주자형, 영왕 주자소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태자 [[주자랑]]은 전란 속에 죽었다. == 생애 == 만력 38년(1610)[* 만력 38년 음력 12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1611년 2월 6일이다.]에 신종의 장남 [[태창제|주상락]]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숙녀[* 황태자의 소실들 가운데 품계가 가장 낮은 호칭이다.] 유씨였다. 부친 주상락은 모친 유씨를 총애하지 않았고, 아들인 주유검 역시 소실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력 42년(1614) 주유검이 5세 때 생모 유씨가 갑자기 사망했다. 《명사》에서는 유씨가 태자 주상락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쫓겨나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복형 [[천계제|주유교]]가 황제로 등극한 후 천계 2년(1622) 13세 나이로 신왕에 책봉되었으며, 천계 7년(1627) 8월 희종이 붕어한 후 제위를 계승했다. 이복형과는 달리 강학에 열중하고 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역대 성군과 현신들의 어진 정치와 가르침을 진정으로 배우고자 했다. 문화전, 무영전 등 궁궐 곳곳에 그들의 초상화와 잠언을 걸어놓고 귀감으로 삼았다. 또 치국의 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의심이 많고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있었다.''' === 생모에 관한 이야기 === [[파일:292px-孝純恭懿淑穆莊靜毘天毓聖皇太后.jpg]] 숭정제의 모후인 효순황태후 유씨의 초상화. 당시 정귀비의 끊임없는 살해 위협에 시달린 태자 주상락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았다. 가끔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 평소에 미워하는 유씨에게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횡포를 부렸다. 유씨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주상락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곧 주상락의 발작 증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신종 만력제와 정귀비가 유씨의 사망 원인을 알았다면 태자 주상락은 당장 폐위를 당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신종과 정귀비가 틈만 나면 신종의 3남이자 정귀비의 소생인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상락은 신변의 내시와 궁녀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유씨가 병사했다고 꾸미고, 입단속을 철저하게 시켰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유씨의 시신은 궁녀의 신분으로 서산에 매장되었다. 서산은 환관이나 궁녀가 죽으면 매장되는 곳이었다. 생모를 잃은 주유검은 서리와 동리의 손에 맡겨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유검은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생모 유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생모의 죽음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주유검이 욱근궁에 거주할 때 시종과 나눈 이야기는 이랬다. ||"서산에 신의왕의 무덤이 있는가?" "있사옵니다." "그 옆에 유귀비의 무덤도 있는가?" "있사옵니다."|| 신의왕은 명나라 제8대 황제 헌종 [[성화제]]의 14남 주우해를 말한다.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주유검에게 생모 유씨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자나 깨나 생모를 그리워하는 그를 가엽게 생각한 어떤 이가 신의왕 주우해의 무덤 옆에 생모 유씨의 무덤이 있다고 몰래 알려주었을 것이다. 주유검은 시종에게 은자를 내어주면서 무덤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직접 달려가 제사를 성대히 지내고 어머니 유씨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였기 때문에 나설 수 없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숭정제는 생모 유씨를 '효순황태후'로 추증하고 시신을 광종 [[태창제]]의 경릉에 합장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유씨가 아들이 황제가 된 덕분에 사후에라도 태후 자리에 오른 것이다. 숭정제는 외조모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모시고 와서 '영국태부인'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동안 핍박을 당한 외척들을 우대하여 생모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숭정제는 생모 유씨가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이별한 까닭에 생모의 얼굴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생모와 함께 지낸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남은 유씨의 초상화도 생전이 아닌 사후에 그린 것이다.] 초상화가 장엄한 의식 속에서 정양문을 통해 황궁으로 들어올 때 숭정제는 오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초상화를 맞이했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신하들도 따라서 울었다. === 인간상 === 숭정제는 통찰력이 있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해서 부지런했다는 장점을 가진 군주였다. 숭정제 자신의 업무 능력과 근면함은 명나라 역사상 비슷한 황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정도이고, 그만큼 부지런한 황제는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몇 명 없다. 오죽했으면 황제의 옷소매가 해질 지경이었다. 즉위 초에는 [[위충현]] 일파를 제거하기도 했고, 황제 자신이 상업적인 수완을 발휘해 수만 냥을 국고에 보태기도 했으며, <죄기조>에 따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 백성들에게 잠시 1년만 폐를 끼치겠다.'며 세금을 올리겠다고 호소하면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평 불만없이 묵묵히 받아들였을 정도로 백성들이 숭정제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또, [[청나라|후금]]의 침략에 맞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식 [[화기]] 공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황제 자신이 직접 [[아담 샬]]과 함께 명나라의 과학 기술을 이끌던 [[서광계]]에게 서양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간 명나라가 사용해온 역법이 오래되어 실제 천문과 맞지 않음을 알고는 예수회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서양식 천문지식을 도입한 《숭정력》을 만들었으나 결국 명나라가 멸망하여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역법은 청나라 시기에 《시헌력》으로 완성되었으므로 아주 헛수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성질이 급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단적이었다는 단점이 큰 문제였는데 이로 인해 결국에는 여러 큰 실책들을 저질러 명나라의 멸망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잘못한 부분이 있거나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가 있으면 바로 목을 베는 등 신하들에게 결코 기회를 주지 않아 숭정제 시절의 신하들은 실패하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는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찮다. 숭정제 입장에서는 무능한 황제들이 여럿 거쳐가면서 썩어빠져버린 관리들의 기강을 단시간에 바로잡으려면 저런 방법밖에 없었다는 게 반론의 논지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만력제나 천계제 같은 무능한 황제들이 연속으로 지나간 이 시대와 비슷한 상황을 거쳤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라가 이 정도로 개판이면 이미 수습은 포기하고 현실부정과 폭력으로 연명하려 할 법도 한데 나름대로 현실 감각있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숭정 10년(1637)에 발표한 <죄기조>에서 그는 자신이 다스린 나라의 부패한 현실을 남김없이 솔직하게 지적했다. 이는 숭정제가 당대 명나라의 문제점을 정확히 궤뚫어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몸을 가지고 일을 꾀하는데, 관직을 장사처럼 생각하여 한껏 차지하고도 더 욕심을 부린다. 심지어는 파면을 당하고도 명령을 어기고 마구 긁어모으고 기회만 생기면 배를 채운다. 또 공신이나 척족들도 만족을 모르고 수도와 지역 땅을 탐욕스럽게 사 모은다. 지방관들은 지역 방어의 본분을 잊고 마을을 침탈하는데, 무뢰배들을 수족으로 삼고 간악한 자들을 받아들인다. 못난 관리들은 세력가들이 두려워 꼬리를 치며 아부한다. 악이 쌓여 관아를 좀먹으니 빌미만 생기면 낚아챈다. 오호라! 연약한 백성들이 어찌 편히 발을 뻗고 쉬겠는가!"''' 애초에 숭정제는 '''무능한 사람을 봐줄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못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대규모 농민 반란인데, 이 농민 반란의 초기 형태는 신종 [[만력제]] 치세 후반부터 이미 터져나오고 있었다. 관중 지방(현 [[섬서성]])은 중국 역사 내내 경제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으나 송대와 원대를 지나면서 생산력이 급감했다. 명나라 중기 이후로 관중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식량을 보급해주는 행정 체계가 붕괴되고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굶어 죽을 판이 되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던 탈영병들과 농민들이 유민이 되어 무장을 갖춘 뒤 명나라 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농민 반란도 명나라 관군이 적극적으로 진압하여 1637년에는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청나라]]가 대규모 병력으로 북방 방어선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농민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기 직전에 정부 진압군을 동북방 방어선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쟁으로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재정이 파탄났고 1639년부터 자연재해가 겹쳐 기근이 일어나자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농민 반란이 다시 대폭발했다. 실로 절묘한 시점에서 역사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명나라는 멸망했다. 한마디로 숭정제는 분명 괜찮은 군주였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 이복형인 천계제가 동생 교육에 꽤 신경을 썼는데,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11세에 형 천계제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 최후 === 결국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 [[북경]]이 이자성군에게 포위되면서 무너질대로 무너진 명나라의 운명을 실감하게 된 숭정제는 조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자기 살길을 궁리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도 오지 않았고-- 마지막 조회를 열었을때는 이미 북경성이 이자성의 군대에게 함락된 후로 숭정제와 함께 하고 싶었던 대신들도 길이 막혀 들어오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최후를 각오한 숭정제는 수행하는 [[환관]] '''왕승은'''(王承恩) 한 명만을 뒤따르게 하고[* 다른 기록에는 마지막으로 혈전을 벌이고자 궁궐 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따르라고 했지만 죄다 달아나고, 왕승은 홀로 남아있자 주저앉으며 '이대로는 싸울 수도 없구나.' 탄식하고는 자결했다는 내용도 있다.] 자신의 도포에 >'''''짐이 등극한 지 17년. [[역적]]이 경성을 핍박하니 짐의 보잘것 없음과 박덕함을 하늘조차 꾸짖는구나.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내가 부덕하여 이런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죽어 지하에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명나라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그대들의 분노는 나의 시체에만 풀어주길 바란다."''' 는 글을 남기고 [[회화나무]]에 목을 매 자진했다.[* 북경을 함락한 농민 봉기의 수령 이자성도 이 애통한 유서를 읽고서 감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자성의 농민군은 숭정제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를 보좌했던 관리들이 부패했다고 여겨서 그들을 고문하고 약탈했지만 죽은 숭정제는 무덤을 만들어주며 예우했다. 이후 숭정제가 자살한 그 나무는 청나라도 건드리지 않고 되려 작게나마 제사를 지내, 숭정제의 넋을 위로하게 하여 명나라의 잔존세력을 회유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다만 나무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베어졌고, 현재 있는 나무[[http://blogfiles.naver.net/20140730_45/whitekiw_1406725666778nxA3r_JPEG/IMG_112794.JPG|#]]는 1983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 자신을 따르던 환관 왕승은도 같은 방식으로 그 뒤의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주군의 뒤를 따랐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베이징]]에는 '''규료왕승은'''(叫了王承恩)이란 속담이 있다. 직역하면 '왕승은을 불러라'라는 뜻인데,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요즘은 용례가 헤퍼져서 대충 [[노답]]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때 황후 주씨도 자결했는데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씨의 합장묘를 만들고 왕승은의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다소 의외의 사실이지만 이자성과 그를 따른 반란군은 자신들한테 아부하고자 숭정제를 폭군이라고 비난한 명나라 대신들을 비열한 탐관오리라고 처벌했을 만큼 숭정제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숭정제는 자결하기 전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황태자 주자랑을 포함한 세 아들을 여장시키고 외갓집인 전씨에게 가서 숨어 있도록 탈출시켰다.[* 당시 태자가 16세였고, 그의 동생들도 모두 10대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자성의 군대에 의해 잡혔다. 딸은 2명이 있었는데 장평[[공주]]와 소인공주 모두 "너는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외치면서 자살 직전에 숭정제가 직접 죽이려 했지만, 큰딸 장평공주는 팔 한 쪽만 잃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 때문에 소설가 [[김용(1924)|김용]]은 《[[녹정기]]》에 장평공주 주씨를 '구난'이라는 여승으로 등장시켰다.) 장평공주는 탈출해서 숨어 살다가 청 순치 2년(1645) 순치제에게 글을 올려 용서를 빌며, 이대로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순치제는 큰 위협이 될 것 없다고 판단하여 관대히 대했으나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는 요청은 거부하고, 대신 생전의 명 숭정제가 장평공주의 약혼자로 정한 주현(周顯)과 혼인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1년밖에 되지 않은 164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 (한국식 나이로) 16세 또는 17세에 불과했다. 황족으로 태어나 평민이 되었다가 결혼한 지 1년만에 요절한,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청나라 조정이 내린 시호가 장평(長平)이라 '장평공주'로 알려졌지만, 명 숭정제에게 공주로서 받은 봉호는 '곤흥'(坤興)이었다.]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은 동생들과 함께 이자성에게 붙잡혀 있다가 전란 중에 태자 주자랑은 살해되고, 동생들은 행방불명되었다. 주자랑은 나중에 [[남명]] 정권에서 홍광제에 의해 '순종 도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이었던 태자비 영씨는 살아남아 청나라의 예친왕 [[도르곤]]에게 바쳐졌으나 수절했고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사후 도르곤이 청군과 함께 북경에 입성하면서 자결한 숭정제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 [[숭정제/평가|평가]]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숭정제/평가)] == 미디어에서 == [[파일:/pds/200904/11/06/b0031106_49e03b5e6a0e9.jpg]] 드라마 <강산풍우정>의 주요 인물들. 맨 앞 가운데 백발을 휘날리는 사람이 숭정제이다.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의 [[주인공]]으로 [[명나라]]의 재건을 위해 분투하나 결국 좌절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중국 배우 이강이 열연했다. 마지막에 백발을 휘날리며 자살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깊다. 그외에 숭정제가 등장하는 [[중국 드라마]]에서는 대다수 열심히 노력했지만 좌절해서 망가지는 모습이 많다. 다만 본인의 큰 단점인 의심많고 독단적이며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는 포용력 없는 성격이 큰 문제라 이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도 있다. [[파일:external/img.timetw.com/12222_2014212134730451.jpg]] 자살하려는 숭정제 야사에 따르면 망국의 때가 다가오자 그 번민으로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하룻밤새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 하는데 그걸 차용한듯 하다. 그런데 중국 드라마 <[[천하]]>에 등장하는 숭정제는 아주 매력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젊은 황족이다. 제위에 등극하기 이전에 환관 [[위충현]] 및 동창과 맞서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상당히 계략도 잘 짜고 정치판에도 익숙한 것을 보면 툭하면 신하들 의심하고 적의 속임수에 넘어서 엄한 장수나 죽일 것 같지도 않다. <천하>에서는 주유검이 황위에 등극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위에 등극할 때 손수 동창 건물을 폭파시키며 군왕의 포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숭정제와 같이 의심많고 너무 주도면밀해서 주변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는 그간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전가의마저 암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참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주성치]] 주연의 <[[구품지마관]]>에서 포용성의 어머니가 --그놈의-- 상방보검을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하는데 명나라의 숭정제가 하사한 보검이라고 말한다. 2013년 영화 <대명겁>에서는 잇다른 농민 반란군에 멘탈이 완전히 붕괴된 황제로 잠시 나온다. 여소군이 맡았다. 2016년 작 드라마 <[[도깨비(드라마)|도깨비]]>의 고려 왕 왕여의 모티브가 숭정제라는 설이 있다. 극의 전개가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한 사건과 유사하게 돌아간다. 한국의 [[대체역사소설]]《마지막 황제, 칼끝에 서다》에서 주인공이 바로 이 주유검, 즉 숭정제이다. 정확히는 21세기 한국의 대학생이 주유검의 몸에 빙의되어 회귀한 주유검의 영혼과 함께 명나라의 멸망을 막고, 오히려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여기선 원역사와 다르게 장렬민황후와 혼인하지 않는다. 또 다른 대체역사소설《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에서는 조선 선비로 빙의한 주인공이 [[경산공원]] 의 회나무에 미리 가 있다가 목을 매달려는 숭정제를 꾸짖고 청군 전령의 복장과 표찰을 주어 환관 왕승은과 함께 남경으로 피난시킨다. 원래 역사와는 다르게 요동총관 [[오삼계]]가 [[산해관]]을 비우고, 명나라 최후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북경으로 왔기에 무사히 남경으로 탈출하여 남명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정지룡]]과 [[정성공]] 부자, 남경 조정의 병부상서였던 사가법, 북경에서 함께 남하한 [[오삼계]] 등과 함께 남명을 수습해 안정시킨다. [[파일:칼부림_숭정제.jpg]] 고일권 작가의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도 등장. 후금군에게 중원이 유린 당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생각하며 친히 갑주를 입고 전의를 다지는 군주다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원숭환]]을 의심하며 훗날의 몰락을 암시한다. [[김용(1924) | 김용]]의 무협소설 [[벽혈검]]에서 주인공 [[원승지]]의 최대 원수로 나온다. 이유는 숭정제가 원승지의 아버지 [[원숭환]]을 죽여서인데[* 김용은 스스로 인정했듯 당시만 해도 중화사상 주의자였고 청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인물로 원숭환을 [[사조영웅전]]의 악비처럼 생각했던 모양이다. 숭정제를 욕하진 않지만 원숭환 처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깐다] 원승지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숭정제를 죽여 복수할 생각이지만 후술할 여자문제로 복수하지 못한다. 숭정제는 원승지를 사랑하는 장평공주 아구의 아버지다. 숭정제는 딸 장평공주가 어린 시절 점괘에서 궁궐 내에 계속 키우면 화를 입는다고 해 속가에서 자라도록 했다. 장평공주는 그 때문에 무공을 익히고 원승지를 만나게 된다. 이후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할 때, 숭정제는 자신이 죽고 나라가 망하면 공주가 욕을 당할 것(장평공주는 작중 최고 미인. 멍청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물정 모르고 여리여리한 성격의 소유자. 아빠가 걱정하기 딱 좋은 딸이다)을 걱정하여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려고 장평공주에 칼빵을 먹인다. 그때 숭정제에게 복수하려고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원승지가 깜짝 놀라 장평공주를 구한다. 장평공주는 아빠한테 칼빵을 맞아 한쪽 팔이 잘리게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본 원승지는 숭정제가 나라를 걱정했던 황제라고 생각해 복수를 중단한다. 하지만 이후 숭정제는 역사대로 자살하고 장평공주는 철검문 목상도인의 제자가 된다. 여담으로 장평공주는 벽혈검 다음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녹정기]]에서 불교에 귀의해 구난사태가 되고 철검문 장문인이자 원승지에 버금가는 최고수--신조협려2--로 나온다. 또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를 제자 비스무리하게 받아 신행백변의 경공을 가르치기도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명사)] [[분류:숭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