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시대]] [[궁궐]]인 [[경복궁]]과 [[경희궁]]의 [[편전]] 기능을 했던 [[경복궁 수정전|수정전]]과 [[경희궁 흥정당|흥정당]]의 [[정문]]이다. [[이름]]은 ‘남쪽(南)을 우러른다(崇)’는 뜻이다. 전통 예법 상 임금의 자리는 남쪽을 바라본다. 즉 왕이 제 자리에서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의미이다. 아래 소개할 두 문은 현재 모두 남아있지 않다. == 경복궁 숭양문 == [include(틀:경복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편전 정문)] [[파일:경복궁 숭양문.jpg]] {{{+1 景福宮 崇陽門}}} [[경복궁]]의 [[편전]] 중 하나였던 [[경복궁 수정전|수정전]]의 [[정문]]이었다. 1층 [[목조]] 문[*A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으로 되어 있었다. 위치는 [[경복궁 수정전|수정전]]의 남쪽, [[경복궁 근정전|근정전]]의 서쪽에 있었으며 존재할 당시 남향하고 있었다. === 역사 === [[경복궁 수정전|수정전]]을 처음 세운 1867년(고종 4년)에 같이 지어졌다. 수정전은 건물도 크고 궐내각사와 내전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곳으로 받아들여져 부속 건물들과 영역의 격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일환으로 남쪽에 무려 3중의 행각을 두었는데 수정전 기준으로 바로 남쪽에 수정문, 그리고 그 남쪽에 영화문, 제일 바깥쪽에 숭양문(崇陽門)을 세웠으며 이 중 숭양문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부속 건물, 행각들과 함께 철거되었고 지금은 [[경복궁 수정전|수정전]]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 특징 === *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으로 공포는 이익공이며 팔작지붕이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숭양문(경복궁)|#]] == 경희궁 숭양문 == [include(틀:경희궁)] [include(틀:조선 왕궁의 편전 정문)] {{{+1 景熙宮 崇陽門}}} [[경희궁]]의 [[편전]] 중 하나였던 [[경희궁 흥정당|흥정당]]의 [[정문]]이었다. 1층 [[목조]] 문[*A 보통 [[한옥]]의 경우 1층보다는 단층(單層)으로 말한다.]이었다. 위치는 [[경희궁 흥정당|흥정당]]의 동쪽에 있었으며 존재할 당시 동향하고 있었다. === 역사 === 1620년([[광해군]] 12년) [[경희궁]] 창건 당시 처음 세워졌으나, 1829년([[순조]] 29년) [[화재]]로 불탔고 2년 뒤에 중건되었다. 하지만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들이 경복궁 중건의 자재로 쓰여 철거되어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단, 이 때 숭양문의 본당인 흥정당 건물 자체는 [[경희궁 숭정전|숭정전]] · [[경희궁 회상전|회상전]] · 정심합 · 사현합 · [[경희궁 흥화문|흥화문]] 등과 함께 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숭양문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나 옛 사진을 보면 흥정당의 행각이 남아있던 것을 보아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그나마 경희궁의 남은 건물들을 매각, 철거하면서 경희궁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질 때 숭양문도 사라졌다. 헐렸는지 팔렸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복원되지도 못했다. === 특징 === * 자세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구조는 모르나 《서궐도안》에 따르면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고 솟을문에 맞배지붕 형식인 것으로 추정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숭양문(경희궁)|#]] [[분류:경복궁]][[분류:경희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