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순화궁'''}}}}}}'''[br]'''{{{#ffd700 '''順和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태화빌딩,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중부 견평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26[* 구 지번주소 종로구 관훈동 194번지.])}}} || ||<-2> '''설립시기''' || 1849년 || ||<-2> '''해체시기''' || 1911년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08 16-14-10.jpg|width=100%]]}}} || || {{{#gold '''순화궁에 들어선 태화빌딩[*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궁|별궁]]이다. == 역사 == 원래 이 곳은 [[세종(조선)|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 부부가 살았던 [[집]]이었다. [[조선]] [[중종(조선)|중종]]이 [[딸]]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중종에게 순화공주란 딸이 없었기에 사실이 아니다. 아마 중종과 [[문정왕후]]의 딸 효순공주와 구수영의 증손자 구사안이 [[혼인]]한 뒤, 중종이 집을 고쳐 지어준 것이 와전된 듯하다. 구사안의 동생 구사맹[* 사족으로 구사안, 구사맹 형제의 동생 구사민의 후손이 현재 [[LG그룹]] 오너 일가이다.]은 [[선조(조선)|선조]]의 서5남 [[정원군]]의 [[장인어른|장인]]이었다. 정원군의 장남이자 구사맹의 외손자가 바로 [[인조]]이다. 그래서 인조가 어렸을 때 외가인 여기서 가끔씩 머물렀다고 한다. 그 때 장난치다가 경내에 있는 [[연못]]에 빠진 적이 많았다는데, 인조가 즉위한 후 그 연못을 용(왕)이 빠졌었다하여 ‘잠룡지(潛龍池)’라 불렀다고 한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4200018|#]] 이후 [[영조]]가 방문하여 여기에서 보관하던 효종의 어필을 본 뒤 구씨들을 불러 상을 주거나 등용하라고 명한 것을 볼 때, 영조 연간까지는 [[능성 구씨|구씨 집안]]에서 소유 및 관리하였던 듯 하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4200018|#]] 그러다 [[19세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할 때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리고 [[헌종(조선)|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 김흥근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 때부터 경빈의 궁호인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렸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33XX44200018|#]] 경빈 김씨는 1907년([[광무]] 11년) 6월에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융희]] 2년) 궁내부 대신이던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곧 이윤용의 동생 [[이완용]]이 차지했다. 이후 순화궁에 속했던 궁속들은 [[서소문]] 안에 있던 [[순헌황귀비]]의 동생 엄준원의 집으로 옮겨갔다. 넓은 궁에 살다 좁은 곳으로 옮긴 궁속들은 불평했고, 급기야 이런 불만이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고 한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순화궁(順和宮)|#]] 그곳마저도 1911년에 일제의 압력으로 [[남작]] [[장석주]]의 소유로 넘어갔고 궁속들은 경복궁 동쪽 간동에 있는 전 호위대 영사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순화궁(順和宮)|#]] 그러나 간동이 아닌 제동으로 옮겼다고 하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동부의 인창면으로 옮겼다고 한다. 옛 순화궁의 주인이 된 [[이완용]]은 이곳을 [[전세]]로 내놓았다. 그리고 전 숙수 출신이자 명월관 사장이던 안순환이 세들어와 음식점 태화관으로 개조해 운영했다. '''바로 [[3.1 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그 태화관이 맞다.''' 즉 친일매국노가 소유한 집에서 독립 선언을 발표한 것(...). 이에 당황한 이완용은 1921년에 건물을 감리교선교부에게 팔았다. 이후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의 감리교 포교지 및 여성 복지 사회재단이 되었고, 나중에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바꾸었다. 1938년에 [[한식|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새로 지어 사용하다가 [[일본 제국|일제]] 말에 징발당했다. [[8.15 광복]] 후에는 경찰서 청사 등으로 쓰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쓰였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렸고, 그와중에 그나마 남아있던 순화궁의 전각들도 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 자리에 태화빌딩이 들어서 오늘에 이른다. == 여담 == * 1856년([[철종(조선)|철종]] 7년) 순화궁의 궁감(宮監)[*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각 궁에서 보내던 사람.]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경계인 철도(鐵島) 지역에서 온갖 종류의 [[세금]]을 새로 만들어서 [[선박]]에 부과하였다. 또한 세금을 못낸 사람들을 불러다 [[곤장]]까지 치는 등 여러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자 보다못한 [[평안도|평안]][[감사]]가 장계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철종은 세금을 거두던 궁감의 자리를 없애고 엄하게 처벌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각 궁과 기관에서 이와 같은 횡포를 저질렀는지를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했다.[[http://sjw.history.go.kr/id/SJW-J07030070-01400|#]] * [[이완용]]이 순화궁 터를 감리교 선교부에 팔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명월관 측은 쉽게 나가려하지 않은 채 영업을 계속했는데 감리교 선교부 측에서 술판이 벌어질 때마다 마당에 들어와 '''[[찬송가]]를 부르며 영업방해를 했다.''' 이에 지지않고 명월관 측에서는 영업이 다 끝난 [[새벽]]에 선교부 측 사람들 [[방]] [[문]] 앞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쳤다고.''' 또한 [[낮]]에는 [[감리교]] 깃발이, [[밤(시간)|밤]]에는 명월관 깃발이 번갈아 꽂히는 [[막장]]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 싸움의 승자는 감리교였다. 그 이유가 허무하다. 나중에 감리교 측에서 [[성조기]]를 꼽았는데 성조기를 함부로 뽑는 것이 외교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