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 국왕]][[분류:1047년 출생]][[분류:1083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순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고려 왕태자)] ---- [include(틀:고려사)]}}}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12대 대왕[br]{{{+1 순종 | 順宗}}}'''}}}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성릉고려.jpg|width=100%]]}}} || ||<-2> {{{#670000 {{{-2 성릉 전경}}}}}} || ||<|2> '''출생''' ||[[1047년]] [[12월 28일]]||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2> '''즉위''' ||[[1083년]] [[9월 2일]]||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만월대|정궁]][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2> '''사망''' ||[[1083년]] [[12월 5일]] (향년 35세)||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만월대|정궁]] 상차[* '상차'는 상이 치러지는 곳을 의미한다. 당시 상이 치러지던 문종의 빈전은 선덕전(宣德殿)이었으니, 상차는 선덕전으로 보인다.][br](現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 || '''능묘''' ||[[성릉]](成陵)|| ||<|4> '''재위기간''' ||'''{{{#f9d537 고려 왕태자}}}'''|| ||[[1054년]] [[11월 15일]] ~ [[1083년]] [[9월 2일]] {{{-2 (28년)}}}|| ||'''{{{#670000 제12대 대왕}}}'''|| ||[[1083년]] [[9월 2일]] ~ [[1083년]] [[12월 5일]] {{{-2 (3개월 3일)}}}[* 역대 고려 국왕 중 재위기간이 짧다.]||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휴([[烋]]) → 훈([[勳]]) || || '''부모''' ||부왕 [[문종(고려)|문종]][br]모후 [[인예태후|인예왕후]] || || '''형제자매''' ||13남 7녀 중 장남 || || '''배우자''' ||[[정의왕후]], [[선희왕후]] || || '''종교''' ||[[불교]] || || '''자''' ||의공(義恭) || || '''묘호''' ||'''[[순종]](順宗)''' || || '''시호''' ||정헌영명'''선혜대왕'''[br](靖憲英明'''宣惠大王''')[* 《고려사》 <순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절일''' ||장흥절(長興節)[* 태자 시절의 [[절일]].]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의 제12대 대왕. 묘호는 순종(順宗), 시호는 정헌영명선혜대왕(靖憲英明宣惠大王), 휘는 훈(勳), 자는 의공(義恭).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문종(고려)|문종]](제11대)의 장남으로서 보위를 이었으나 병약했던 탓에 3개월 가량의 재위 끝에 붕어한 비운의 군주이다. 후임은 동생 선종이었다. == 생애 == === 출생과 즉위 === 《[[고려사]]》 <순종 세가> -총서-에 따르면 아버지인 문종 8년 2월 계묘일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문종 원년에 태어났으니 8세에 태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태자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지라 이래저래 부왕과 신하들의 걱정을 많이 산 듯. 아니나다를까 문종이 붕어하자 너무 슬퍼한 것이 탈이 되어 안 그래도 원래 병약한 몸이 악화되면서 즉위한지 고작 3개월만에 결국 부왕의 뒤를 따라간다. 태자로서 28년이나 있었으나 왕으로는 3개월 뿐이었으며, [[조선]]의 제12대 임금인 [[인종(조선)|인종]]보다도 재위 기간이 5개월이나 짧다. 그래서 문종의 조문을 위해 [[요나라]]의 사신이 고려로 오다가 다시 되돌아가 순종의 조문까지 준비하고 다시 오기도 했다. 한편 고려 입장에서는 순종이 3개월만에 죽자 요나라가 이를 정변이라 트집잡아 외교 문제로 번질까 우려하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거란]]과의 2번째 전쟁이 시작된 것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고려 조정의 우려대로 순종의 죽음을 알리러 갔던 외교관 [[이자인(고려)|이자인]]이 [[도종(요)|요 도종]]의 힐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자인은 요나라를 설득해 요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했다. === 사후 === 별다른 업적없이 붕어하여 그의 동생인 [[선종(고려)|국원공 왕운]]이 왕위에 오른다. 자식에게 물려준 것도 아니고 자식에 대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봐서 병약한 몸 때문에 후사도 낳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사도 짧다. * 8월 * 갑신일. 문종을 경루에서 장사지냈다. * 경자일. 왕이 신봉루로 가서 사면령을 선포했다. * 겨울 10월 * 초하루 계유일. 회경전에서 사흘동안 도량을 열고 승려 30,000명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 갑신일. 왕이 자신의 동생인 왕운을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올려주고 식실봉 1,000호를 덧붙여주라고 지시했다. * 왕은 젊어서 지병이 있었는데 선왕의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 애통해한 나머지 병이 더욱 심해졌다.(王小有疾 居廬哀毁 疾益篤) * 을미일. 친동생 국원공 왕운으로 하여금 국사를 임시로 맡아보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짐(朕)은 [[문종(고려)|군부(君父)]]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고려|방가(邦家)]]의 중기(重器)를 손에 쥐었다. 매사에 조심하여 부탁받은 권한을 조심히 살폈다. > >군공(群公)과 장구(長久)의 책략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경사를 누리고, 조상의 공로를 빛나게 하고자 했다. > >그러나 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니, 걱정이 병이 되었다. 때가 흘러 계속 누적되니,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번 겨울 초에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바람 앞 등불같은 몸이 어떻게 환기(幻期)[* 대참(大漸), 대기(大期)와 같은 뜻으로 죽음의 때, 죽음의 시기를 의미한다.]를 견더낼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사직]]의 도(社稷之圖)는 반드시 예속에게 이어져야 한다. 지금 모제(母弟)[* 순종과 선종은 모두 [[인예태후]]의 자식이다.]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국원공(國原公) 운(運)은 다능하고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 성덕(盛德)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형정(刑政)의 이로움과 병폐를 마음 깊히 알고 있으니, 구오지존(九五之尊)[* 유교 서적 《[[주역]]》에 나오는 표현으로 '올바른 제위(帝位)'를 의미한다. 순종의 4대조인 태조 또한 자신의 옥좌를 '구오통림의 극(九五統臨之極)'으로 표현했다.]에 오른다면 억조(億兆) 명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 > >그러니 구소(柩所)[* 관을 안치한 곳. 여기선 빈전(殯殿)을 의미한다.] 앞에서 군권(君權)을 가지도록 하라. 무릇 국조(國朝)의 상벌대사(賞罰大事)는 모두 사군(嗣君)의 뜻을 따르라. 밖에 있는 주진(州鎭) 관원(官員)들은 본군(本郡)에서 거애하고 자신의 관사를 떠나지 마라. 상복의 제도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 >오호라(於戱)!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 >오로지 몇몇 고굉(股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들이 충력(忠力)을 다하여 내 [[선종(고려)|친왕(親王)]]을 보좌하고, 보력(寶曆)이 무궁(無窮)하도록, 환구(環區)[* 바다로 둘러싸인 곳. 여기선 고려를 의미한다.]를 잇는다면 짐(朕)이 눈을 감아도 어떤 유감이 있겠는가? >---- > - 《고려사》 <순종 세가> 중. 순종의 유조(遺詔).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 순종 성릉.jpg|width=100%]]}}} || |||| '''{{{#670000 순종의 무덤인 성릉의 모습}}}''' || == 가족관계 == 부인이 3명이 있고 슬하에 자식은 없다. * 제1비: [[정의왕후]] 왕씨 - [[정간왕|정간왕]][* [[순종(고려)|순종]]의 [[삼촌|숙부]]]의 딸 * 제2비: [[선희왕후]] 김씨 - 김양검(金良儉)의 딸 * 후궁: [[장경궁주]] 이씨 - [[이호(경원백)|이호]]의 딸 == [[태묘]] 악장 == [[고려]] [[성종(고려)|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고려)|예종]] 대 순종 왕훈의 찬가 제목은 <익선>(翼善)이다. 네 글자 운구이다. >생각컨데 왕께선 하늘을 받들고[* 보통 하늘을 받들었다고 하면 군주의 업무를 잘했다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하늘은 부왕 문종을 뜻한다.] 공손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을 우선하였습니다. >무군(撫軍)하고 감국(監國)하시니[* 태자가 부왕을 보좌하는 것을 의미한다.] 30여년 동안 행했습니다.[* 태자로서 30년 넘게 있었다는 뜻이다.] >밝게 빛나는 촛불을 잇고 더 흥하게 하신지 얼마 안되어 구름을 타고 멀리 가셨습니다. >그러나 큰 덕이 형성되어 노래와 악기에 흘러들어갔습니다. > >화목하신 선왕(先王)께선 덕이 으뜸이셨습니다. >따뜻한 문덕(文)은 하늘이 낳았으며 부드러운 은혜는 날로 드러났습니다. >의(醫)로 민(民)을 구했으며 고(考)[* 족보상 아버지를 이르는 말. 즉 문종을 의미한다.]를 이어 효를 다했습니다. >때를 맞추어 규범있게 제사를 지내니, 식에 따라 태묘를 우러러 보겠습니다.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해 찬가에는 왕태자로서의 역할을 잘했다고 되어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순종, version=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