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통치 기구]][[분류:고려]][[분류:수사기관]][[분류:해체된 군부대]]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중기 [[원 간섭기]]에서 [[여말선초]]의 [[친위대]], [[사법]], [[공안]] 기구. 약칭은 순군부로, 사평순위부, 의용순금사로 부르기도 했다. 이를 줄여 부르면 순위부, 순금사가 된다.[* 또다른 순금사로는 이후 [[오위]]의 충무위로 발전한 충무순금사가 있었다. 충무순금사의 본래 이름은 금오위.] == 역사 == [[충렬왕]]이 치안을 담당하고자 편성한 순마소(巡馬所)가 그 시초이다. 순마소는 [[원 간섭기|몽골의 간섭]] 당시 원나라가 치안을 명목으로 고려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내정간섭]] 기구 중 하나로, 그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제공관(提控官)을 몽골에서 파견한 [[다루가치]]가 맡았다. 이후 고려 후기가 되면서 순마소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명칭이 바뀌어 확대 개편되어 그 명맥이 유지된다. '만호(萬戶)'가 들어간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관제 또한 [[몽골]] [[천호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병력 대부분이 기병화되어 있었다. 이 시기 순군부의 역할을 보면 전문수사기관이라기보다는 일본의 [[경시청]]이나 영국의 [[런던광역경찰청]]과 유사했다. 초기에는 설치 의도대로 [[개경]]을 순찰하며 도둑을 잡는 등 치안 업무만 처리했다. 하지만 고려 말의 혼란 속에 갈수록 그 권한은 갈수록 늘어났다. 직접 수사를 진행하거나 [[사헌부]]와 공조해 관리들을 [[감찰]]하기도 했고, 재산권 소송을 처리하거나 형벌을 집행하고 감옥을 관리하는 등, 군사 겸 사법기관 및 수사, 공안 역할까지 겸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종국에는 [[반란군]] 진압과 외적 방어, [[헌병]] 역할에다 [[친위대]]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일종의 [[내무군]]으로까지 성장했다. 병력 숫자도 갈수록 증가해, 고려 말을 기준으로 만호부 휘하에 3개 군, 조선 초에는 5개 군으로 늘어났다. 순군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공민왕]] 시기 원나라와 고려의 주종관계가 깨지면서 순군만호부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 기구에서 고려 왕실의 수족으로 변화했다. [[기철]] 일당을 일망타진한 것도 이들이다. 그 막강한 권한과 군사력 덕에 정권을 장악한 세력이 반대파를 감찰, 체포하고 제거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말의 [[권신]] [[이인임]]이나 [[충신]] [[최영]]은 순군을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했고, [[이성계]] 또한 [[위화도 회군]] 이후 순군을 바탕으로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이 때문에 순군부는 간관들의 주요 비판 대상이기도 했다. == 후신 == [[조선]]이 건국된 후 순군만호부는 군사적 기능은 신생 [[조선군]]으로 이관하고 사법, 공안 기구로 재편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금부]]이다. 그리고 의금부는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에 공안기구라는 속성이 제거되고 근대적 법제에 따라 완전한 사법기구인 [[평리원]]으로 개편된다. 평리원은 3심을 담당하며 대한제국의 [[최고법원]]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었으나 1907년 일제가 강제로 폐지하고 통감부 휘하의 대심원[* 일본 제국의 대법원인 대심원(현 일본국 [[최고재판소]])의 제도를 본땄다.]으로 업무를 이관했다. 이로써 고려 말의 순마소에서 근대의 평리원으로 이어지는 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최고법원 역할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이 맡다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 [[대법원]]이 이어받았다. == 기타 == 순군만호부, 즉 약칭인 순군부(巡軍府)는 [[나말여초]] [[고려]]의 [[군령권]] 관부인 [[순군부]](詢軍部)와는 시대적 배경과 업무가 다른 별개의 관청이다. == 관련글 == * [[의금부]] * [[고려군]]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의금부, version=156, paragraph=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