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054년 출생]][[분류:1105년 사망]][[분류:개성시 출신 인물]][[분류:고려 국왕]][[분류:고려의 후작]][[분류:고려의 공작]] [include(틀:역대 고려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670000 '''숙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고려의 왕자/선종 ~ 공양왕)] ---- [include(틀:권지고려국사)] ---- [include(틀:고려사)]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제15대 대왕[br]{{{+1 숙종 | 肅宗}}}'''}}}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려 숙종 영릉.jpg|width=100%]]}}} || ||<-2> {{{#670000 {{{-2 영릉 전경}}} }}} || ||<|2> '''출생''' ||[[1054년]] [[9월 2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연화궁[br](現 [[경기도]] [[개성시]]) || ||<|2> '''즉위''' ||[[1095년]] [[11월 7일]]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만월대|정궁]] 중광전[br](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 ||<|2> '''사망''' ||[[1105년]] [[11월 10일]] (향년 51세) || ||[[고려]] [[개성시|개경 개성부]] [[만월대|정궁 황성]] 장평문 밖[br](現 [[경기도]] [[개성시]] 송악동) || || '''능묘''' ||[[영릉]](英陵) || ||<|6> '''재위기간''' ||'''{{{#f9d537 고려 계림후}}}''' || ||[[1065년]] [[4월 2일]] ~ [[1077년]] [[3월 31일]] {{{-2 (11년)}}} || ||'''{{{#f9d537 고려 계림공}}}''' || ||[[1077년]] [[3월 31일]] ~ [[1095년]] [[11월 7일]] {{{-2 (18년)}}} || ||'''{{{#670000 제15대 대왕}}}''' || ||[[1095년]] [[11월 7일]] ~ [[1105년]] [[11월 10일]] {{{-2 (10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희(熙) → 옹(顒) || || '''부모''' ||부왕 [[문종(고려)|문종]][br]모후 [[인예태후|인예왕후]] || || '''형제자매''' ||13남 7녀 중 3남 || || '''배우자''' ||[[명의태후|명의왕후]] || || '''자녀''' ||8남 4녀 || || '''종교''' ||[[불교]] || || '''자''' ||천상(天常) || || '''묘호''' ||'''[[숙종]](肅宗)''' || || '''별호''' ||[[숙조]](肅祖) || || '''시호''' ||강정문혜'''명효대왕'''[br](康正文惠'''明孝大王''')[* 《고려사》 <숙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 '''작위''' ||계림후(鷄林候)[br]계림공(鷄林公) || || '''절일''' ||대원절(大元節)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제15대 대왕. 묘호는 숙종(肅宗), 시호는 명효대왕(明孝大王), 휘는 옹(顒), 자는 천상(天常). 제11대 [[문종(고려)|문종]]의 3남이었다. 숙종은 보위에 오른 '''[[헌종(고려)|조카]]를 반 강제로 내쫓고 권좌를 차지'''했다. 《[[고려사]]》에는 숙종과 대립하던 외척 인천 이씨 가문의 [[이자의]]가 왕위를 뒤바꿀 계산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숙종이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그를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오히려 숙종이 왕위를 차지할 목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이자의 등 자신과 정적 관계에 있었던 반대파들을 제거한 뒤 헌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종의 [[친위 쿠데타]]'''[* [[김종서(조선)|김종서]]를 죽이는 '[[계유정난]]'과도 모습이 흡사하다.]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숙부인 숙종이 보위를 이어받은 것인데, 유교적인 부자 상속보다는 전통적인 형제 상속이 선호되었던 당시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큰 비판을 받지 않았다. 숙종은 [[남경(고려)|남경]] 수축, [[서경(고려)|서경]] 우대 등을 통해 개경 중앙 귀족을 견제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대외적인 여진 정벌을 선포해 [[북벌]]을 누차 시도한 강성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인천 이씨]]를 비롯한 중앙의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측근 위주의 정치'''를 펼쳐 점차 국왕 주변 측근 세력들의 힘이 커졌고, 여진과의 잦은 전투로 국력을 소비시킨 단점도 있었다. 뒤를 이은 [[예종(고려)|예종]]은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 정벌]]이라는 부왕 숙종의 의지를 이어갈 정도로 강경하고 명철한 임금이어서 괜찮았지만 손자인 [[인종(고려)|인종]] 대에 이르러서는 측근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폐단이 드러나게 되었다. == 묘호, 시호, 존호 == 공식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복령궁주 묘지명>엔 '숙묘'(肅廟)라고 나온다. 숙종은 이후 왕가의 시조이기 때문에 '숙조'(肅祖)라고도 불렸다.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명종, 신종 → 희종, 강종 → 고종 → 원종 순으로 전부 숙종의 직계 자손들이다. 시호는 '강정문혜명효대왕'(康正文惠明孝大王)이다. 아들 예종(제16대)이 '명효'를 올렸고, 손자 인종(제17대)이 '문혜', 5대손 고종(제23대)이 '강정'을 올렸다. 대표시호인 '명효대왕'(明孝大王) 중 '''효'''(孝) 자는 '선왕의 대업을 효성스럽게 잘 받들어 이었다'는 뜻으로 받는다. 이는 가장 무난한 시호로 숙종 이후 모든 국왕이 '효' 자 시호를 넣어 받았다. 대표시호 중 '명'(明) 자는 '밝을 명' 자로 시법상으로 괜찮은 시호이다. 숙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을 칭호로 쓰기도 했다. 조카 헌종은 그를 '''번저의 중신'''(藩邸重臣)이자 '''천원의 기쁨'''(天源之發慶)이라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Z&cate2=&dataGubun=최종정보&dataId=ITKC_BT_1365A_0230_020_0090&viewSync=OT|불렀다.]] 숙종은 넷째 딸 복령궁주의 묘지명에서 '천자'(天子)로 불렸다. 아들 <왕효 묘지명>에서 예종이 숙종을 '선제'(先帝)로 불렀다. == 생애 == === 즉위 전 === ||<|2> '''{{{#670000 작위}}}''' ||계림후(鷄林侯) ||문종(제11대)의 오등봉작제는 신하의 5등작, 왕족의 3등작으로 구분되는데 숙종은 왕족으로서 3등작에 봉해졌다. 봉국(封國)인 '계림'은 신라의 별칭 중 하나다. || ||계림공(鷄林公) ||후작에서 진작된 공작위. 봉국은 같다. || || '''{{{#670000 훈위}}}''' ||상주국 ||제일 높은 훈위. 훈위는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주는 명예직이다. || || '''{{{#670000 공신호}}}''' ||수인보의공신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받은 보의공신호 || || '''{{{#670000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 ||종 1품 품계로 가장 높은 품계 || || '''{{{#670000 수직}}}''' ||수사공 ||수직은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관직을 받을 때 붙힌다. 사공은 [[삼공]] 중 하나다. || || '''{{{#670000 직위}}}''' ||상서령 ||고위 왕족에게 주는 명예직. 명목상 [[상서성]]의 최고위 직위다.[* 실질적인 최고위직이자 장관직은 [[좌복야]], 우복야 두 직위이다.] || >幼而聰慧 及長 孝敬勤儉 雄毅果斷。五經子史 無不該覽 文宗愛之 嘗曰 後之復興王室者 其在爾乎。 >어려서 총명했고, 자라서는 효성스럽고 근검했으며 성격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5경(五經)과 제자백가서 및 사서를 빠짐없이 두루 공부해 문종이 “장차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바로 너다.”라며 무척 아꼈다. >---- >《[[고려사]]》 <숙종 세가> -총서- 중 1054년 9월 2일 [[문종(고려)|문종]](제11대)과 [[인예태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065년 공작위에 봉해져 계림(鷄林)을 분봉받았다. 원래 이름은 '희'(熙)였으나 [[요나라]]의 제9대 황제 [[천조제]]의 이름과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에 개명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고려)|태조 신성대왕 왕건]]의 유훈이었던 <[[훈요 10조]]>에 따라 형제 상속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있었기에 왕이 후사가 없거나 뒤를 이을 [[태자]]가 너무 어리거나 허약하면 왕의 형제들을 다음 [[후계자]]로 삼는 일이 공공연했다. 숙종의 아버지인 문종도 [[정종(고려 10대)|정종]](제10대)의 동생으로서 형제 상속을 통해 왕위를 계승했다. 형이자 선왕인 [[선종(고려)|선종]](제13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림공 왕희는 일찍이 아버지 문종이 아낄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고 유능해서 신하들이나 종친들 모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었다. 별 어렵지 않게 다음 왕이 되겠거니 하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웬일인지 형 선종이 자신을 제치고 병약한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버린 것이다. 계림공 본인으로서는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어차피 본인이 왕을 꿈꾸는 야심가인데다 [[조카]]인 헌종 역시 병약해서 왕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 계림공 왕희는 자신의 조카 [[한산후|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려 실권을 잡으려고 하는 [[외척]] 세력의 수장 격인 [[이자의]]와 대립한다. 그러다 1095년 7월, 결국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희는 [[소태보]]와 [[왕국모]]를 시켜 [[만월대]]의 선정문 앞에서 이자의를 [[살해]]하고 일당들까지 모두 제거했다. 그런데 이자의가 역모를 꾸민 것을 기회로 숙종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나 순서가 약간 애매하다. 이자의가 먼저 난을 일으키고, 숙종이 이를 방어하면서 제압한 형태인지 아니면 이자의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을 사전에 눈치채고 숙종이 [[선제 공격]]을 행해서 제압한 형태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자의가 권세를 부리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역모 계획은 아직 세우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숙종이 이자의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선제 공격했을 가능성도 제기해 볼 수 있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헌종이 재위 1년 만에 숙부인 계림공에게 [[양위]]하면서 고려의 제15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훗날의 [[세조(조선)|조선 세조]] 이유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왕이 된 헌종을 [[시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종은 상왕으로 지내다가 곧 병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세조가 [[사육신]]의 복위 운동 이후 [[단종(조선)|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서 영월로 [[유배]]보내고, 결국 사사까지 시킨 것과 달리, 고려 숙종은 굳이 조카를 죽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자연스레 [[왕권]]을 확립시켰으니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몰래 헌종을 죽이고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말]] 한거 아닌가?'라는 의심을 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조선 《[[세조실록]]》에서는 단종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나오지만 후대의 기록을 보면 [[세조(조선)|세조]]가 직접 사사 명령을 내리고 단종이 이를 거부하자 목을 졸라 시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고려 헌종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병사가 맞다. 숙종이 굳이 헌종의 목숨을 스스로 거둘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헌종이 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복위]] 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진 조선 단종과는 달리 헌종은 그런 지지 세력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도 나름 [[정통성]]이 있었고 지지 세력도 탄탄했기에 숙종 입장에서는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 달리 명분으로 꿇리는 편은 아니었다. 고려 숙종은 조선 세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집권했는데 조선 세조는 반대 세력인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의 세력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역모]]로 몰아서 제거한 뒤([[계유정난]]) 집권한 반면 고려 숙종은 반대 세력인 이자의의 세력이 역모를 꾀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이자의의 세력을 제거한 후 집권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략) >(이자의는) 이에 이르러 병사들을 궁궐 안에 모아 장차 거사를 일으키려 하니, 계림공(雞林公) 왕희(王煕)가 명복궁(明福宮)에 있다가 은밀히 이를 알아차리고는 소태보(邵台輔)를 깨우치기를, “국가의 안위가 재상에게 달려있소. 지금 일이 급하니, 공(公)이 도모해야 하오.”라고 하였다. 〈이에〉 소태보가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로 하여금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와 시위(侍衛)하게 하고,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로 하여금 이자의와 그의 당여인 합문지후(閤門祗候) 장중(張仲), 중추원당후관(中樞院堂後官) 최충백(崔忠伯)을 선정문(宣政門)에서 참하도록 하였으며, 이자의의 아들인 주부(主薄) 이작(李綽)과 장군(將軍) 숭렬(崇列)·택춘(澤春) 등 17인을 나누어 잡아 모두 죽이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자위]](李子威)와 소경(少卿) 김의영(金義英), 사천소감(司天少監) 황충현(黃忠現) 등 50여 인은 남쪽 변방으로 유배 보낸 뒤, 적당(賊黨)의 처자(妻子)들을 적몰하여 양계(兩界)에 있는 주진(州鎭)의 노비로 삼았다. 이자위는 이자의와 결탁하여 국정을 전단하고 권세를 부렸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선종이 총애하는 동생 5인이 있었음에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여 이러한 난리를 초래하였다고 기롱하였다. >---- >《[[고려사절요]]》 헌종(獻宗) 1년 7월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j&types=r#detail-kingYear/kj_006r_0020_0020_0060_0030/14/1095/07|#]] === 재위 === ==== 내치 ==== ===== 화폐 발행과 불교 정책 =====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대로 '주전도감'을 설립하여 화폐인 해동통보, 삼한통보를 제조해 유통을 시도하는 한편 사찰도 많이 지어 [[불교]] 세력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이 부분도 조선 세조와 같지만 세조는 불교를 개인 신봉한 경우이며, 이게 단종의 목숨을 빼앗은 것과 엮이는지는 애매하다. 그리고 조선은 [[국교]]가 [[유교]]지만, 고려는 국교가 불교라서 고려 왕실의 사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러니 공통점이라 보기에는 영 애매한 부분.] 그런데 숙종의 지시로 만들어진 해동통보는 고려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지 못했다. 화폐가 통용된 건 먼 훗날인 [[18세기]]다.[* 여담으로 화폐가 통용된 조선시대의 임금이 [[숙종(조선)|숙종]]이다.] 시대를 앞서도 너무 앞서나간 셈. 또 불교 진흥 정책에 대해서는 동생 의천을 통해서 교종을 통합하여 왕권 강화 시도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견해이다. ===== 근친혼 금지령 ===== 1096년 유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숙종은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근친혼을 막은 가장 큰 이유는 [[문벌귀족]]들의 혼맥의 난맥상을 막기 위해서였다. 유교적인 것은 나중 문제였다. 그러니 시행되자마자 무시당한다. 당시 왕이건 신하건 백성이건 "그딴 중국 풍습을 왜 우리한테 강요하나요?? 중국 풍속 꺼져!"라고 하면서 무시하는 바람에 사문화되었다. 본인의 자식들만 해도 아들 [[예종(고려)|예종]]은 두 명의 사촌을 왕비로 들였으며, 4명의 딸들은 모조리 6촌 이내의 종친과 근친혼을 했다. '''그렇지만 근친혼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현재의 관념은 통상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 국자감 서적포 설치 ===== 서적 간행의 활성화와 관학 교육 진흥을 위해 국자감에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했다. 이는 부왕 문종 이후 지나치게 커진 사학 즉 사교육이 강화되는 풍토를 억제시키고, 관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의도이기도 했다. ===== 기자 숭배 ===== 서경인 평양에 [[기자(상)|기자]] 사당을 건립하고, 기자에 대한 숭배를 강화했다. ===== 남경 천도 논의 ===== 숙종 재위기에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 '한양부'에서 '남경'으로의 승격은 부왕인 [[문종(고려)|문종]] 때이다.]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지리 전문가였던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s-1.4|도선기]]》(道詵記), <[[도선#s-1.4|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도선#s-1.4|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했다. 그리고 1104년에 [[남경 별궁]]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했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괜히 남경으로 승격된 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수도 한성이 위치했었을 만큼 지리적으로는 요충지이긴 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가까운 위치에 수도 개경이 위치하고 있어서 이런저런 자원을 흡수당하느라 잠재력에 비해서는 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조선시대에 남경의 후신인 한성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진 후에는 역으로 개성이 인적자원 등을 한성에 다 뺏기게 된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왕궁 조성은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여년 뒤 태조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경복궁]]을 지었다. 김위제가 이런 것까지 보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쨋든 그의 [[풍수지리학]]적 분석처럼 조선시대부터 남경이 수도가 되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남경 별궁]]의 자리가 [[청와대]]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맞기는 맞은 셈이다. ===== 연이은 반란과 진압 ===== 특이한 것은 숙종의 동생 부여후 [[왕수#s-2|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둥, 다음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자 그를 역모죄로 잡아 들였다는 것이다. 왕수는 이후 바로 유배를 떠났고,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복권시켜 주었다. 숙종 자신은 조카 헌종으로부터 양위를 통해 형 선종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다음 왕위는 자신의 큰아들 왕우에게 물려주고 싶어했다. 사실 이 때까지도 고려에서는 형제 상속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던 듯 하다. 이 때 형제 상속이 자연스럽게 보인데에는 고려 전기의 왕들의 수명이 대체로 짧았다는 점이 컸다. 그러다 보니 사후 자식의 나이가 제위를 잇기에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40줄을 넘긴 왕들이 많치 않다. 왕들을 추려봐도 태조 왕건부터 시작해, 제4대 광종과 제8대 현종, 후대의 제11대 문종과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 제16대 예종을 빼고는 전부 40세 이전에 붕어했다.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근친혼으로 인한 후유증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도 연달아 군주들이 이른 나이로 붕어했는데 근친혼의 후유증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반면 근친혼이 없었던 조선 국왕의 평균 수명은 만 47세로 통일신라와 고려보다 5년 가량 더 길다. 사실 5년 차이도 크진 않은 것이 의외로 조선의 군주들도 오래 산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국왕이라는 위치 자체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올 수 밖에 없고, 정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중한 업무로 인한 과로 등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거기다 매일 앉아서 정무를 보던 임금들의 특성상 몸이 상하기 쉽다는 것도 플러스 요소. 그래도 선종이나 숙종, 더 나아가 예종의 경우를 보면 정작 왕 자신은 형제 상속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경위는 기록에 없지만 부여후 왕수가 형제 상속을 염두에 두고 나대기는 했던 것 같다. 말년에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 김자진의 반란을 겪기도 한다. 또한 재위 기간 중에 유독 우박이 많이 내렸고, 송충이가 들끓어 수도 개경의 [[소나무]]가 많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 외치 ==== 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개칭하여 제주도를 지방행정조직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한편 재위 말년에 들어 북방의 [[여진족]] 완안부와의 전투에서 큰 코 다친다. 여진 정벌의 총지휘관이었던 임간이 공적에 정신 팔려 완안부의 세력권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대패하면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반면교사 삼아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윤관]]을 기용해 '''[[별무반]]'''을 양성하며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 세력과의 전면전에 철저히 대비했다. 당시 완안부의 힘이 꽤 강해진 탓에 고려의 영향권이 미치는 곳까지 점차 유의미한 위협을 가해왔고, 이에 고려가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해동천하관'''이 무너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고려는 이전까지 여진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탐라국]], [[우산국]] 등 주변 약소국이나 세력을 [[번국]]으로 여기며, 고유의 [[외왕내제]]로 대표되는 체제 안에 편입시켰는데 그 질서를 완안부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레 거슬러 버린 것이다. === 최후 === 재위 10년째인 1105년 숙종은 [[여진]] 정벌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봉은사]] 등 여러 사찰에 [[제사]]를 지내고 [[태자]] [[예종(고려)|왕우]]를 시켜 [[도교]] 초제를 지내게 했다. 3월 [[국청사]]에 어머니 [[인예태후]]가 만든 금탑(金塔)을 세우기도 했다. 6월 점차 [[몸]]이 안 좋아지는걸 느꼈는지 태자 왕우의 관부인 [[수춘궁]]에 관리를 붙여주었다. 8월 [[평양시|서경]]에 나아가 [[장락궁]]에 머물렀는데 9월까지 머무르며 군사 훈련을 주도했고 태자 및 중신들에게 [[활]]쏘기를 시켰다고 한다. 태자를 [[동명왕릉]]에 보내 제사지내게 했으나 9월 말부터 몸이 갈수록 안 좋아졌고, 황급히 어련을 탄 채 [[개성시|개경]]으로 환궁했다. 1105년 10월 2일, 환궁하던 중 [[만월대|본궐]]에 도착하지 못한 채 황성의 장평문에서 사망했으며 붕어 선포는 궁성 서문 서화문에서 했다.[* 향년 52세였는데 [[수명]] 또한 대[[후배]]인 [[세조(조선)|세조]]와 똑같다.] 여진 정벌은 자신의 뒤를 이은 [[예종(고려)|예종]]이 이어받아 진행하게 된다.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고려|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샌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하건대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을 모험했으나 질병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 >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왕좌|방기(邦基)]]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예종(고려)|왕태자(王太子)]]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맡긴다. > >방진주목(方鎭州牧)[* '방'(方)은 [[천하]], [[제후]]를 의미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군현제.]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 >'''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 '고굉'은 팔이란 뜻인데 고굉대신은 '팔 같은 신하', 즉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과 백벽(百辟)[* '벽'(辟)은 '임금 벽' 자다. '백벽'은 '100명의 임금', 즉 '100명의 [[제후]]'를 말한다.]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 > >'''그리한다면 짐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 >《고려사》<숙종 세가>에 기록된 [[조서(명령)|유조]]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ukjong_Korea.jpg|width=100%]]}}} || 2017년 8월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개성시 선적리에서 숙종의 [[왕릉]]을 찾아냈다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52400|발표]]했다. 5월~6월에 20여 일에 걸친 작업으로 발굴된 유물의 연대, 묘지 양식, 문헌 기록의 대조를 통해 확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려 숙종 영릉.jpg|width=100%]]}}} || || '''{{{#670000 정비 이후의 사진}}}''' || == 가족관계 == 숙종은 1명의 왕후와 결혼했으며, 이는 고려 왕조의 다른 왕들이 적어도 후궁을 1명이라도 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물론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헌종, 충목왕, 충정왕, 창왕은 제외. 명의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이 7명, 딸이 4명으로 총 11명이 있었다. 하지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279|귀법사 적소수좌 현응 묘지명]](歸法寺 寂炤首座 玄應 墓誌銘)에 따르면 귀법사 주지 [[현응(고려)|현응]](玄應)이 숙종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명의왕후]]의 소생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명의왕후 외에 최소 한 명의 다른 왕비가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수좌”라는 시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서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제1비: [[명의왕후]] 류씨 - [[류홍(고려)|류홍]]의 장녀 * 태자 왕우(王俁): [[예종(고려)|예종 문효대왕]] 태자 왕우, 즉 미래의 [[예종(고려)|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자랑해 동생들을 누르고 그들의 근신들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숙종의 둘째 아들 [[상당후|상당후 왕필]]이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었으나 1098년에 사망했다. 막내 남동생인 [[통의후|통의후 왕교]]는 22세인 1120년에 사망했다.[* 1098년 생으로 예종의 동생들 중에선 유일하게 생몰년이 확실하다.] 사실 예종도 쉽사리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다. 부왕인 숙종의 치세 때 예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부여공|부여후 왕수]]가 대놓고 왕위에 오를 준비를 한다는 등의 소문에 얽혀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예종 역시 맏아들이었음에도 고려는 왕위의 형제 상속이 가능했기에 마음 놓고 지낼 순 없었다. 이후 예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손자였던 [[인종(고려)|인종]]은 작은 아버지들과 그 근신들을 제압하지 못하면서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즉위한다. 숙종의 아들들은 모두가 적자인데다가 고려는 형제 상속이 더 선호되다 보니 나이가 어린 인종의 입지는 더욱 작아졌다. 당장 조부였던 숙종조차도 형제 상속을 주장하며 왕위를 조카인 [[헌종(고려)|헌종]]에게서 뺏어왔고, 심지어 조정 내에서 별다른 반항도 없었다. 인종의 근신인 [[이자겸]]은 이런 숙종의 왕자들과 끝없는 정쟁을 벌여 결국 승리하고, 뒤이어 막강한 권력을 잡게 된다. * [[상당후|상당후 왕필]](王佖) * [[징엄|원명국사]] 왕징길 → 왕징엄(王澄儼) * [[왕보(대방공)|대방공 왕보]](王俌) * [[대원공]] 왕여 → 왕효(王侾) * [[왕서(제안공)|제안공 왕서]](王偦) * [[통의후|통의후 왕교]](王僑) * [[대령궁주]](大寧宮主) - [[회안백|회안백 왕기]][*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와 혼인 * [[흥수궁주]](興壽宮主) - 승화백 왕정(承化伯 王禎)[* [[낙랑공|낙랑공 왕영]]의 장남]과 혼인 * [[안수궁주]](安壽宮主) - [[왕원(광평공)|광평공 왕원]][* [[조선국 양헌왕|조선국 양헌왕 왕도]]의 차남]과 혼인 《고려사》 공주열전엔 안수궁주(安壽宮主)로, 《고려사》 종실열전에는 안수공주(安壽公主)로, 남편인 [[왕원(광평공)|광평공 왕원]]의 묘지명에는 순정공주(順貞公主)로 기록되어 있다. * [[복녕궁주]](福寧宮主) - 진강백 왕연(晉康伯 王演)[*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과 혼인 [[https://portal.nrich.go.kr/kor/ksmUsrView.do?menuIdx=584&ksm_idx=3199|복녕궁주는 묘지명이 현존하고 있다.]] 숙종의 넷째 딸이며 진강백(晉康伯) 왕연(王演)[* [[문종(고려)|문종]]과 [[인경현비]]의 아들 [[진한공|진한공 왕유]]의 차남]에게 시집갔다. 궁주는 묘지명에서 '왕희'(王姬), '종실현녀'(宗室賢女), '천자지녀'(天子之女)란 별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 38세에 죽었으며, 묘지명엔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향'은 황제가 아닌 '상제의 고향'을 말한다. 고려시대 왕족의 죽음에 단골로 등장하는 비유이다. 후대 [[명종(고려)|명종]]의 《애책문》[* 애사(哀辭)의 일종으로 왕과 왕후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글]에도 이 비유가 나온다. 숙종의 딸은 모두 [[종실]]들과 혼인하였다. * 제2비: 미상 * [[현응(고려)|적소수좌 현응]](玄應) - 모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숙종의 아들이다. == 평가 == [[신라]]의 제41대 [[헌덕왕]] 김언승, [[조선]]의 제7대 [[세조(조선)|세조]] 이유처럼 [[애장왕|조]][[단종(조선)|카]]의 왕위를 빼앗고 강제로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도덕]]적인 면에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일단 즉위한 후 본인의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많은 업적을 남겨서 옥좌에 오른 이후 훈구파 등 부패 세력들을 양성하여 조선의 정치를 썩게 한 세조와는 달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가 대부분 반박을 당한 세조 이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변호들이 정작 숙종 왕희에게는 정말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조선의 [[태종(조선)|태종]] 이방원과 [[세조(조선)|세조]] 이유를 비교하면 세조가 훨씬 못하다고 평가받듯이 [[고려]]사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광종(고려)|광종]] 왕소와 비교하며 숙종 왕희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역시 대[[후배]] 세조처럼 광종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는 것이다. 광종은 피의 [[개혁]]을 통해 고려라는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쌓았던 반면 숙종은 측근 [[정치]]를 행하여 [[외척]]이나 [[권신]]들의 권한이 커지게 만들었으며 여기에다 20세기 후반의 고려사 [[연구]]자 중에서는 숙종이 시작한 [[여진족|여진]] 정벌마저 '''국내 정치의 난맥을 수습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한 엄청난 [[삽질]]'''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서울특별시|남경]] 건설 및 여진 정벌로 [[백성]]들을 고단하게 만들었기에 《[[고려사]]》에는 이 때에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다'라고 기록했는데 전부 부역에 동원되거나 심지어는 부역과 징병을 피해 도망쳐 유랑민이 된 경우였다. 근신 정치로 인해 숙종 다음 [[예종(고려)|예종]] 시기부터 [[경원 이씨]][* 인천 이씨 또는 인주 이씨]들이 득세하며 [[문벌귀족]]의 고착화가 심해져 그의 손자인 [[인종(고려)|인종]] 대에 여러가지 혼란이 찾아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부왕 [[문종(고려)|문종]] 대부터 있어 왔던 경향이며, 오히려 숙종보다는 문종이 경원 이씨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자연(고려)|이자연]][* 아이러니한건 문벌귀족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자연은 [[이자의]], [[이자겸]] 등 [[왕실]]에 반란을 일으킨 [[후손]]들과는 달리 철저히 [[신하]]로서 문종을 보필해 여러 [[정책]]에 참여했고 인품 역시 훌륭했다.]을 등용해 [[힘]]을 실어주는 등 대놓고 문벌귀족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문벌귀족 세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모두 문종의 탓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도 많은데 문제의 근원만 따지고 보자면 오히려 고려 초기인 [[성종(고려)|성종]](제6대) 때부터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진 정책은 완안부 여진족의 팽창[* 여진족이 고려의 변경을 먼저 침]으로 고려의 변경이 위험해졌으므로 숙종의 탓으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많은 편이다. 일단 집권할 때부터 이자의와 그 끄나풀들을 철저히 [[뿌리]]뽑아서 경원 이씨의 득세에 제동을 건 장본인도 바로 숙종이었다. 집권한 후부터는 [[왕권]]을 강화하는데 있어서도 [[화폐]]를 제조하거나 6촌 이내 [[근친혼]]을 금지시키고 [[승려]]가 된 동생 [[의천]]을 통해 [[불교]]를 통합하려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기도 하다. 숙종과 대립했던 이자의에 대해 살펴보면 유명한 이자겸의 사촌으로 경원 이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연히 숙종 대에는 이자의의 [[반란]]과 [[숙청]]으로 경원 이씨의 기세가 한 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숙종 사후 3년 뒤 예종이 자신의 2번째 왕후로 [[문경태후|이자겸의 딸]]을 들이면서 경원 이씨의 전횡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예종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은 강성 [[군주]]라서 이런 전횡이 벌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종은 도리어 아버지 숙종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는데 앞서 경원 이씨들이 난립했다고 하는 부분마저도 정작 예종 시기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작 백관들은 경원 이씨가 외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는데 이것도 무시하고 강행 처리를 할 정도로 예종의 [[권력]]은 막강했다. 반면 다음 [[왕조]]의 국왕인 세조는 숙종보다 왕권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고, 이후 세조 다음의 왕들이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는 왕들로 전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쓰디 쓴 평가를 듣는다. 더욱이 숙종은 위협이 될 만한 일부 척신들만을 제거했을 뿐 신하들을 그렇게 도륙내지는 않았던 반면 세조는 [[집현전]] 출신 [[사대부]]들이 [[사육신#s-3|단종 복위 운동]]에 많이 가담했다는 이유로 아예 집현전을 해체시켜버리는 치명적인 실책까지 저지르며 악평을 듣게 된다. 사실 [[고려]]의 왕과 [[조선]]의 왕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 자체가 다르고 환경, 사상, 정치적 배경 등 모든 것이 다르다. 고려는 [[중세]]와 [[근세]]를 잇는 [[과도기]]적인 시기에 있던 국가이고, 조선은 과도기를 지난 근세의 국가이다. 이는 마치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분청사기]], [[백자]]를 단순 비교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단순히 [[재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세조와 숙종 모두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본처에게만 충실한 [[애처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숙종은 정실 [[왕후]]인 [[명의왕후]]만 있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무려 7남 4녀를 보았다. 세조 역시 [[대군]] 시절 [[첩]]으로 들였다가 즉위 이후 격상한 예를 제외하면 후궁을 새로 들이지 않고, 정실인 [[정희왕후]]에게만 충실했다. == [[태묘]] 악장 == 고려 [[성종(고려)|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제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제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숙종은 태묘의 아홉번째 방에 모셔져 있었고, 악장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종(고려)|예종]] 대 숙종 왕옹의 찬가 제목은 <중광>(重光)이다. '거듭 빛나다'라는 뜻. [[만월대]]에 같은 이름의 편전이 있었다. 네 글자 운구이다. >생각컨데 황숙고(皇肅考)[* 돌아가신 아버지를 의미함.]께선 의과 인와 함께 하셨습니다. >구가의 임무[* 태묘에 제사지내는 군주의 임무를 의미함.]가 나에게 왔는데, 위엄있는 영혼이 마치 신과 같습니다. >경기(慶基)를 중흥(重興)시키니 뛰어난 갑옷을 남기셨습니다. 종과 북을 두들겨 때에 맞추어 도와주셨습니다. > >우리 아름다운 황고(皇考)께선 청명하시고 하늘의 법을 지켰습니다. >도를 위해 존경하고 근면하셨으니 그 마음이 연못을 채울 수 있습니다. >뛰어난 계획과 신령한 판단은 바람을 불게하고 천둥을 울리게 합니다. >제가 그 덕을 잇고 싶으니, 부디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들 예종이 아버지 숙종에게 올린 태묘 악장. 사촌인 헌종은 건너 뛰었다. == 기타 == * 숙종의 대선배들이 바로 [[백제]]의 제16대 [[진사왕]]과 [[신라]]의 제41대 [[헌덕왕]], [[발해]]의 제6대 [[강왕]]이다.[* 헌덕왕과 강왕은 시기가 겹치는데 옆나라니만큼 찬탈 소식이 전해지며 강왕이 헌덕왕의 롤모델 역할을 했을 가능성 또한 있다.] 진사왕은 조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먼저 스틸해버렸고 이 과정에서 선대왕이자 형인 [[침류왕]]을 시해했단 의혹이 있다. 다만 조카는 살아남아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아신왕]]. 죽이지 않고 추방만 한 것인지 죽이려 했는데 도망쳐서 살아남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헌덕왕은 조카 [[애장왕]]을 제 손으로 직접 시해했는데, 고려의 숙종과 [[조선]]의 세조는 조카를 쫓아내기만 했지 제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 다른 점은 헌덕왕은 신라를 말아먹은 [[암군]]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라는 이미 헌덕왕 즉위 전부터 제36대 [[혜공왕]]을 [[시발점]]으로 이미 조금씩 조금씩 답이 없어지기 시작한 국가였기는 했지만... 또 조선의 세조는 쫓아낸 이후에 이미 반란에 연루되었던 조카를 귀양지에서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는 [[자살]]인데, 사실은 [[사약]] 먹고 죽었거나 혹은 사약을 거부한 교살로 죽었다는 의심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 대중매체 ==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무명(육룡이 나르샤)|무명]]과 손을 잡고 군주가 되었다며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 2016년 6월 5일 방송된 [[KBS]] 역사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27회차에서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라는 제목으로 여진 정벌과 윤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숙종을 소개했다. == 같이보기 == * [[고려의 여진 정벌]] * [[윤관]] * [[헌덕왕]]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숙종, version=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