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서울특별시 강남구의 법정동인 수서동, rd1=수서동)] [include(틀:중국 흠정 24사)] ||<:><-2>'''{{{#fecd21 {{{+1 수서}}}[br]隋書[br]Book of Sui}}}''' || ||<:> '''{{{#fecd21 저자}}}''' ||<(>[[위징]] || ||<:> '''{{{#fecd21 시기}}}''' ||<(> [[7세기]] [[당]] || ||<:> '''{{{#fecd21 언어}}}''' ||<(> [[한문]] || ||<:> '''{{{#fecd21 권 수}}}''' ||<(> 85권 || ||<:> '''{{{#fecd21 분량}}}''' ||<(> 581년 ~ 618년 (37년)[br] [[문제(수)|수 문제]] 원년 ~ [[공제(수)|수 공제]] 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隋書''' 중국의 [[24사]] 중 하나이며, '''정관 5사'''(貞觀五史) 중 하나이기도 하다. 622년, [[영호덕분]](令狐德棻)이 [[남북조시대]]의 역사와 [[수나라]]의 역사서 편찬을 주청했다. 이러한 국책사업은 정관 연간에 결실을 맺게되는데 《[[양서(역사책)|양서]]》(梁書), 《[[진서(남조역사책)|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등과 함께 동시에 《수서》가 편찬되었다. 《수서》는 636년,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위징]](魏徵) 등이 완성한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으로 구성된 것과 656년. 우지녕(于志寧) 등이 완성한 다섯 왕조의 <지>(志) 30권으로 구성된 것을 합간하여 부른다. == 구성 == [include(틀:수서)]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총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 [[당나라]]는 당시 통일제국으로 발돋음하고 있었고, 당나라 이전 중국은 [[후한]] 이후로 수백년간 분열시대('''[[위진남북조시대]]''')를 겪은 혼란기였기 때문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수서》가 편찬된 것이다. 《수서》는 <제기>와 <열전> 그리고 <지>까지 편입시켜서 《오대사지》(五代史志)라고도 불린다. 《수서》는 분명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역사서였으며, 그래서 수나라의 멸망을 당 고조 [[고조(당)|이연]]이 수 공제 [[양유]]로부터 선양받은 618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당나라의 정통임을 어필하기 위한 서술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북사》를 제외한 나머지보다는 그 내용이 풍부하다. 따라서 《수서》의 사료적인 가치는 상당하다. 다만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는 잘 안 알려진 떡밥의 요람이다.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신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다느니, 백제와 신라가 왜를 대국으로 섬겼다느니 하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멀리 중국에서 입수한 불분명한 소식들을 쓴 것'''으로, 특히 괴상한 뜬소문이 많은 신라의 경우, 6세기 중반 제24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하기 이전까지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황해]]에 항구가 없어, 중국과 교류한 역사가 삼국 중 가장 짧았다.[* 몇 차례 고구려나 백제 사신단에 딸려 간 적은 있는데, 백제 사신은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모르는 점을 이용해 신라를 백제의 속국이라고 중국에 이야기하기도 했다. <[[양직공도]]>에서 신라(사라)가 백제 속국 중의 하나로 나온 것도 이런 일방적인 언플 때문이었다.] 때문에 《수서》의 기록은 한국 현지의 사서들이나 금석문과 상충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즉, 잘못 알려진 잘못된 사실들과 기록, 오해들도 전부 기록되어 있는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보는 게 옳다. 이는 바다 건너의 반대편 《[[일본서기]]》도 마찬가지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시절에 [[위(삼국시대)|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모용선비족의 침입으로 동부여가 세워진 연유와 비슷하다.]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 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 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국내 번역 == 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수서 전체를 완역하였다. [[https://m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36239495?query=%EC%88%98%EC%84%9C&NaPm=ct%3Dlkdifzj4%7Cci%3Ddd547bf9b9ab2aa5c859ef5d94313b2bb9beb013%7Ctr%3Dboksl%7Csn%3D95694%7Chk%3Dcd8dd84a380a4ae817823f0c6a1034826ca62240|수서 번역본]] [[분류:수당시대]][[분류:중국 정사]][[분류:관찬사서]][[분류:기전체]][[분류:단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