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송병일}}}'''[br]'''宋炳一'''}}}}}}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송병일(1914).jpg|width=100%]]}}} || || '''본관''' ||[[송(성씨)|신평 송씨]][* 참판공파 25세 병(炳) 항렬.] || ||<|2> '''출생''' ||[[1914년]] [[9월 25일]][* 신평송씨족보에는 6월 13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송(성씨)|신평 송씨]] 집성촌이다.] || || '''사망''' ||미상 || || '''묘소'''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송병엽]]은 그의 4촌 형이다. == 생애 == 1914년 9월 25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에서 아버지 송은식(宋恩植, 1881. 2. 16 ~ 1934. 9. 14)[* 초명 송낭근(宋琅根).]과 어머니 [[제주 고씨]] 장흥백파 고제열(高濟烈)[*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이다.]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제주 고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인 [[파평 윤씨]](1878. 9. 21 ~ 1910. 4. 20) 윤상룡(尹相龍)의 딸은 슬하게 아들을 두지 못하고 1910년 4월 20일 요절했다.] 그는 일찍이 상경하여 [[중동고등학교|경성부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초 학우 박정두(朴鼎斗)·이종태(李鍾泰) 등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 등 신사상을 학습했다. 중동학교 4학년 재학 중에는 학교를 중퇴하고, 1934년 4월 [[일본]] [[도쿄]]로 유학했다가 1935년 5월 귀국한 후 고향인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비합법적 조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중순 주산리 자택에서 농민들과 회합하여, 각자가 거주하는 마을에 존재하는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를 이용해 겉으로는 '도박의 방지, 공동경작' 등 '생활개선'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관변조직인 농촌진흥회를 활용하여 각 부락마다 임원을 선임하고 매월 음력 15일에 임원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위장하고, 그 이면에서 의식의 교양과 동지 규합을 통해 결사를 조직하겠다는 취지였다. 같은 달 17일 송병일의 자택에서 김영기(金永基) 등 십수 명과 다시 회합하여 '주산농촌진흥회'라는 결사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이후 같은 해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임원회를 개최하면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그는 1936년 1월 말,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장성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송병일은 같은 해 6월 3일 이종태(李鍾泰)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송병일 등의 활동은 인근 삼서면 남계리에서 1934년부터 동일한 성격으로 결성되어 활동한 노동회(勞動會)라는 비밀결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소위 '장성독서회(長城讀書會) 사건'으로 칭하였다. 이후 그는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1937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24&evntId=0034992204&evntdowngbn=Y&indpnId=000002320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같은 날 광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1940년 징역 1년 6개월로 은사감형(恩賜減刑)된 사실이 확인되며, 이외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송병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신평 송씨]][[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914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