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손응룡}}}'''[br]'''孫膺龍'''}}}}}}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손응룡.jpg|width=100%]]}}} || || '''호''' ||우전(雨田) || ||<|2> '''출생''' ||[[1920년]] [[5월 5일]] ||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천리 317번지[br](현 [[함경북도]] [[어랑군]] 수남리) || ||<|2> '''사망''' ||[[2018년]] [[8월 28일]] (향년 98세) || ||[[경기도]] [[남양주시]] || || '''직업''' ||[[교수]] || || '''학력''' ||용정 광명중학교[* 1946년 9월 16일, 은진중학교(恩眞中學), 동흥중학교(東興中學), 대성중학교(大成中學), 광명여자중학(光明女子中學), 명신여자중학교(明新女子中學)이 [[https://baike.baidu.com/item/%E9%BE%99%E4%BA%95%E5%B8%82%E9%BE%99%E4%BA%95%E4%B8%AD%E5%AD%A6/3082183?fromtitle=%E9%BE%99%E4%BA%95%E4%B8%AD%E5%AD%A6&fromid=22344714|용정중학교]](龍井中學)로 통합되었다.] {{{-2 (졸업)}}}[br][[우쓰노미야대학|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 {{{-2 ([[농업경제학과|농정경제학과]] / 졸업)}}}[br][[홋카이도대학]] [[농학부]] {{{-2 ([[농학]] / [[학사]])}}}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20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생명과학대학 생명공학부). 1990년 [[대한민국 훈장#s-4|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1920년 5월 5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천리 317번지(현 어랑군 수남리)에서 태어났다. 그 뒤 형의 직장을 따라 가족이 [[중화민국]] [[지린성]] [[용정시|연길현 육도구 용정촌]](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정했고, 1939년 3월, [[창춘시|신경특별시]]와 [[선양시|봉천시]]를 거쳐 [[다롄]]에서 [[요코하마]]행 여객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9대 농업학교 중에 하나인 [[우쓰노미야대학|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宇都宮高等農林学校)[* 現 [[우쓰노미야대학]] 농학부의 전신.]의 [[농업경제학과|농정경제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42년 3월, 우츠노미야고등농림학교 졸업성적 상위 10%만 입학할 수 있었던 [[홋카이도제국대학]](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홋카이도제국대학 조선인 학생 비밀결사 '''북우회'''(北友會)를 결성하고 있었고, 손응룡 선생은 [[입학]]과 동시에 그 곳에 가입했다. 북우회에 가입한 선생은 당시 교포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 단결과 학도병제도 반대,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비롯해 조국독립의 필요성과 방법 등을 가르치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대]]에 체포[* 나중에 알고보니 북우회를 밀고한 사람이 '다가야마'라는 [[조선인]] 헌병보라서, '조선인이 조선인을 고발한 사건인데 우리가 어떻게 관대하게 처벌할 수 있겠느냐'라는 담당 [[검사(법조인)|검사]]의 말을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되어 [[삿포로]] [[토요히라]] [[육군]] [[헌병]]대 [[유치장]]을 거쳐 홋카이도형무소 지소에 이감된다. 북우회 활동과 관련해 조직 활동을 하게 된 계기, 회합장소, 시간, 대화내용 등을 약 6개월 간 취조받고, 1944년 5월 12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북우회' 사건으로 선생과 함께 구속됐던 유학생들 중 북우회 회장 김현구 4년, 이배함·엄상국 2년 6개월, '''[[장종원]]'''·임종묵 2년 등 각각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나에보(苗穂)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해방 후, 1945년 10월 7일 [[형집행정지]][* [[연합군 점령하 일본|연합군사령부]]의 [[정치범]] 석방 결정이 늦어지면서 형집행정지도 늦어지게 되었다.]로 풀려나게 된다. 그 후 대학에 복학하여 1946년 2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46년 [[농림부]], 1949년 [[경북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대구농과대학]] 교수를 거쳐, 1954년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고려대학교 농과대학]]에 [[교수]]로 부임했다. 1967년 8월 8일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이사]]에 [[https://www.etnews.com/20210628000300|선임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작물학회 부회장,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제11대 한국작물학회 회장을 [[https://www.cropscience.or.kr/staticdata/static/society/past-executive/|역임했다]]. 1985년, [[http://www.kostas.kr/|한국연초학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8년 8월 2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 독립운동 내용 == 1942. 3월 북해도(北海道) 제국대학(帝國大學) 재학중(在學中) 비밀 결사(秘密結社) 북우회(北友會)를 조직(組織)하고 한국유학생(韓國留學生)을 규합(糾合)하여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을 위해 학생(學生), 일반 교포(一般僑胞) 및 징용자(徵用者)의 민족의식 고취(民族意識鼓吹)와 독립사상(獨立事想)을 앙양(昻揚)하기 위하여 계속(繼續)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 상세 === *첫째, 일본의 국력이 전쟁으로 피폐해졌을 때 우리가 일제히 봉기하기 위하여 우선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각자가 학생징용자·일본교포·징용위안부들에게 민족의식의 앙양 및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둘째, 중국인 유학생들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면서 일본의 패전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독립지도체제와 후원방법을 협의하였다. *셋째, 이배함·이종묵과 함께 교포가정을 방문하여 그 자녀들에게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넷째, 독일(獨逸)국민에게 고함, 한국 농업지대(韓國農業地帶)·삼민주의(三民主義)등의 도서를 탐독하고 평가하면서 독립방법을 연구하였다. *다섯째, 탄광이나 징용에 끌려간 노무자 및 각 도시에 산재해 있는 유흥업소의 부녀자를 계몽하는 방법을 협의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 상훈 == 녹색혁명훈장을 비롯해 국민훈장 동백장,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수여받았다. == 저서 == * 雨田漫錄(우전만록) 後悔(후회)없이 살아온 길 : 손응룡박사 자전에세이 *(공예작물학)工藝作物學 *생장조절제를 이용한 연초제조법 건조법 및 품질개선에 관한 연구 *(식물생리학)植物生理學 *함께 걷는 길 *농.생물통계학(農.生物統計學) 등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교수]][[분류:이학 교수]][[분류:경성군 출신 인물]][[분류:1920년 출생]][[분류:2018년 사망]] [[분류:홋카이도대학 출신]][[분류:국민훈장 동백장]][[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경북대학교 재직]][[분류:고려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