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군인]]. 최종 보직 [[제15보병사단]] 부사단장. == 생애 == 1932년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읍 학성리(현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출생. [[울산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했다. 1960년 경 [[박정희]]의 부관을 지냈으며 [[4.19 혁명]] 직후인 5월 2일에는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라는 박정희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전속부관을 지냈으며, 군정 종식 이후 군으로 복귀하여서는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로 중령 때 [[청와대]] 외곽의 경비를 책임지는 [[수도방위사령부|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을 역임했다. 연대장도 동기 중 가장 먼저 되어 [[제9보병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다녀왔다. || [[파일:3717694133_FWVriX5p_4.jpg|width=100%]] || ||1967년 8월 17일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이·취임식 후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이 [[전두환]] 후임 대대장, 오른쪽이 손영길 중령.|| 1964년에는 동기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권익현]] 등과 함께 [[하나회]]를 만들었다.[* 본인 주장에 의하면 하나회를 실제로 창설한 것은 자신이며 본인 업무가 바빠서 전두환을 회장으로 시켰다고 한다.] [[박정희]]의 부관을 2차례 지내며 4년 넘게 보좌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때문에 육사 11기의 명백한 선두주자였으며 30대대장 직을 전두환이 물려받은데서 보이듯이 당시에는 전두환보다 앞섰다. [[승승장구]]하던 손영길은 별을 단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준장으로 강제 예편당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권력 실세였던 [[윤필용]]의 참모장이었던 그가 윤필용이 박정희에 대한 역모죄로 [[숙청]]당하자 세트로 숙청당한 것. 본인은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당시 자신을 제치려고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가 자신을 배신해 그를 모략했다고 주장했다.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383269_STD.jpg|width=100%]] || ||1973년 4월 29일 [[윤필용 사건]] 관련 재판 당시 사진. 가운데 인물이 손영길 [[준장]]. 오른쪽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계급)|소장]]||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으나 1년 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83년 귀국하여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주선으로 [[부산광역시|부산]] 신선대에 미국 PPG사와 합작으로 [[페인트]] 제조업체인 동주산업을 설립해 [[기업]]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이 때 전두환이 미안했던지 이런저런 도움을 줬다고 한다.] 2006년 지분을 합작선인 미국 PPG에 넘기고 사업을 접었다. 윤필용 사건이 있은 후 38년이 지난 2011년 2월 3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되찾았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896336|관련 기사]] 손영길은 국가배상금으로 받은 5억원 전액을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으로 기탁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0573668#home|#]]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32년 출생]][[분류:중구(울산) 출신 인물]][[분류:울산공업고등학교 출신]][[분류:육군사관학교 출신]][[분류:하나회]][[분류:밀양 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