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손사의'''(孫士毅, [[1720년]] ~ [[1796년]])는 [[청나라]]의 정치인이다. 자는 지치(智冶), 호는 보산(補山)이고, [[저장성|절강]] 인화현(仁和縣, 현재 위항구에 속함) 임평진(臨平鎭) 사람이다. 관직이 문화전대학사(文華殿大學士)에 이르렀다. == 생애 == 건륭 26년([[1761년]])에 신사은과(辛巳恩科)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듬해 [[1762년]]에 내각중서(內閣中書)로 제수되었고, 또한 특별히 한림원시독(翰林院侍讀)으로 제수되었다. 건륭 33년([[1768년]]), 무자과(戊子科) 사천정주고(四川正主考)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1769년]] 봄, 대학사(大學士) 부항(傅恆)을 따라 군대를 통솔하여 [[미얀마]] 원정에 참여하였고, 전장(典章)을 갖추어 주(奏)를 올렸다. 군공으로 호부광서사낭중(戶部廣西司郞中)으로 제수되었다. 곧이어 경인향시(庚寅鄕試) 호남정주고(湖南正主考)로 임명되었고,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승진하였으며 광서포정사(廣西布政使)로 부임하여 운남(雲南)으로 파견되었다. 얼마 안가 순무(巡撫)로 승진하였으나 총독(總督) 이시요(李侍堯)가 탐독(貪瀆)으로 면직되자, 자신은 감찰을 소홀히 한 것으로 이리(伊犁)로 유배되어 수비를 맡았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문서에 기록되었는데, [[건륭제]]가 그의 청렴함을 가상히 여겨 다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로 제수되었었고, 《[[사고전서]]》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편찬 이후 태상시소경(太常寺少卿)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다시 산동포정사(山東布政使), 광서순무(廣西巡撫), 광동순무(廣東巡撫)로 부임하였으며, 건륭제의 조서를 받들어 서상(舒常)을 대신해 양광총독(兩廣總督) 겸 관월해관무(管粵海關務)를 맡았다. 건륭 51년([[1786년]]), [[타이완|대만]] 천지회(天地會)의 임상문(林爽文)이 봉기를 일으키자 조주(潮州)로 가서 경비하고 진압하였다. 이듬해 [[1787년]]에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였다. 건륭 53년([[1788년]]), [[베트남]] 떠이선 왕조의 [[응우옌후에]]가 [[후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위를 빼앗았다. 후 레 왕조의 군주 [[레 민제]]는 입국을 청하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손사의는 군사를 이끌고 진남관(鎭南關)에서 방비를 갖추었으며, 건륭제에게 이 일을 상주하였다. 건륭제는 손사의가 일의 경중을 인식하고 요점을 안다면서 표창하였고, 명을 내려 운남총독(雲南總督) 오대경(烏大經)과 병사를 나누어 두 갈래 길로 베트남을 공격하여 민제를 귀국 및 복위하도록 했다. 손사의가 이끄는 양광의 병사는 파죽지세로 [[하노이|탕롱]]을 공파하니 오대경의 운남 병사보다 더욱 신속한 것이었다. 건륭제는 크게 기뻐하며 손사의를 일등모용공(一等謀勇公)으로 봉하고 홍보석정(紅寶石頂)[* 《舊典備征》卷二 朱彭壽,「賜紅寶石頂者孫土毅 乾隆五十三年」]을 하사하였으나 손사의는 이를 사양하였다. 건륭제는 민제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책봉한 뒤 손사의에게 명을 내려 개선하도록 했으나 손사의는 군공을 탐하여 안남에 머물렀다. 이듬해 [[1789년]] 정월, 응우옌후에는 춘절(春節)을 틈타 탕롱을 기습하였고, 민제는 진남관으로 도망쳤다. 청나라군은 대패하였고, 손사의는 창졸간에 관내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건륭제는 손사의가 조서를 받들어 회군하지 않았다고 하여 봉작에서 파하고, 홍보석정과 쌍안화령(雙眼花翎)을 철회하고 총독직을 해제하였으며, 명을 내려 진남관에 머물러 일을 다스리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수도로 소환한 뒤[* 《春冰室野乘》裡說,孫士毅在乾隆帝接見時,送給皇帝一隻鼻煙壺。後來和珅向皇帝索去。]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제수하고, 군기대신(軍機大臣)으로 충임하였다. 이해 겨울, 사천총독(四川總督)으로 배속하였다가 곧이어 양강총독(兩江總督)으로 대신하였다. 이때 서주(徐州)에서 황하의 제방이 터지자 손사의는 모성(毛城)을 쌓고 패언(壩堰)을 펼쳐 이재민을 구원하였고, 건륭제의 지의(旨意)라고 일컬었다. 건륭 56년([[1791년]]), 건륭제가 손사의를 불러 이부상서(吏部尙書),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를 제수하였다. 같은 해, 청나라 조정이 [[구르카]]와 전쟁을 벌였고, 건륭제는 손사의에게 명을 내려 사천총독(四川總督)을 도와 급료를 조달하도록 했다. 궤운(饋運)에 결함이 없었으므로 그 공로로 다시 쌍안화령을 하사하였고,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제수하였으며, 잠시 사천총독을 대신하도록 했다. 건륭 60년([[1795년]]), 호남(湖南)의 묘인(苗人)들이 봉기를 일으켜 사천(四川) 수산(秀山) 경내로 공격해 들어오자 손사의는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다. 가경 원년([[1796년]]), 호북(湖北)의 [[백련교]] 교도들이 봉기를 일으켜 사천(四川) 유양(酉陽) 경내로 침입하자 손사의는 병사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였고,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자 그 공로로 삼등남작(三等男爵)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6월, [[후베이성|호북성]] 시남부(施南府) 내봉현(來鳳縣)의 군중에서 졸하니 [[공작(작위)|공작]]의 작위를 추증하였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고 하였다. 그의 손자인 손균(孫均)이 백작의 작위를 세습하였다. 저작으로는 자신이 지은 시를 모아 만든 《백일산방시집(百一山房詩集)》 시부 12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 참고문헌 == *《[[청사고]]·권330》 == 외부 링크 == [[http://npmhost.npm.gov.tw/ttscgi2/ttsquery?0:0:npmauac:TM%3D%AE%5D%A4h%BC%DD]] 孫士毅 中研院史語所 [[분류:청나라의 정치인]][[분류:1720년 출생]][[분류:179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