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from=인수대비, other1=이 인물을 소재로 한 종합편성채널 JTBC의 사극, rd1=인수대비(드라마))] [include(틀:역대 조선 왕세자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소혜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추존 왕비)]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include(틀:역대 조선 대왕대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ffd400 '''조선 의경세자의 세자빈[br]{{{+1 수빈 한씨 | 粹嬪 韓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d0730, #1b0e64 20%, #1b0e64 80%, #0d0730);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존호 · 시호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color: #FFD400" '''조선 덕종의 왕비[br]{{{+1 소혜왕후 | 昭惠王后}}}'''}}}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성종조 왕대비[br]{{{+1 인수왕대비 | 仁粹王大妃}}}'''}}}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연산군조 대왕대비[br]{{{+1 인수대왕대비 | 仁粹大王大妃}}}'''}}}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소혜왕후경릉.jpg|width=100%]]}}} || ||<-2><#1b0e64> {{{#ffd400 {{{-2 경릉 전경}}} }}} || ||<|2> '''출생''' ||[[1437년]] [[10월 16일]]^^([[음력]] [[9월 8일]])^^[* 공교롭게도 [[음력]] [[9월 8일]]은 소혜왕후의 시아버지 [[세조(조선)|세조]]의 기일이다. 이 때문에 소혜왕후가 인수왕비로 책봉된 [[1470년]](성종 1년)부터, 그녀의 탄신 하례는 이튿날인 [[9월 9일]]에 올리게 되었다.]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504년]] [[5월 21일]]^^([[음력]] [[4월 27일]])^^[*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숭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한 바로 전 날이다. [[KBS]] [[드라마]] [[왕과 비]] 등에서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br](향년 66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훗날 [[숙종(조선)|숙종]]의 비 [[인현왕후]]도 여기서 [[죽음|승하]]한다.][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 || '''능묘''' ||[[서오릉|경릉]](敬陵) || ||<|10> '''재위기간''' ||'''{{{#ffd400 조선 왕세자빈}}}''' || ||[[1455년]] [[9월 16일]] ~ [[1470년]] [[3월 3일]] || ||'''{{{#ffd400 조선 왕세자빈 | 정빈·수빈}}}''' || ||[[1457년]] [[9월 29일]] ~ [[1470년]] [[3월 3일]] || ||'''{{{#ffd400 조선 인수왕비}}}''' || ||[[1470년]] [[3월 3일]] ~ [[1475년]] [[4월 11일]] || ||'''{{{#ffd400 조선 왕대비}}}''' || ||[[1475년]] [[4월 11일]] ~ [[1495년]] [[2월 3일]] || ||'''{{{#ffd400 조선 대왕대비}}}''' || ||[[1495년]] [[2월 3일]] ~ [[1504년]] [[5월 2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청주 한씨]] || || '''휘''' ||□산(□山) || || '''부모''' ||부친 서원부원군 [[한확]] (西原府院君 韓確, {{{-3 1400 ~ 1456}}}) 모친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南陽府夫人 南陽 洪氏, {{{-3 1403 ~ 1450}}}) || || '''형제자매''' ||3남 6녀 중 6녀[* 언니 정선군부인 한씨 남편이 [[세종(조선)|세종]]의 8남, [[계양군]]이다. 그래서 동생 [[인수대비]]하고는 숙모와 조카 며느리사이다.] || || '''배우자''' ||[[의경세자|덕종]] || || '''자녀''' ||{{{#!folding 슬하 2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월산대군]](月山大君, {{{-3 1454 ~ 1488}}}) 장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3 1456 ~ 1482}}}) 차남 - '''[[성종(조선)|성종]]'''(成宗, {{{-3 1457 ~ 1494}}})[* 봉호는 자을산군(者乙山君) → 잘산군(乽山君).]}}}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불교]] || || '''봉작''' ||군부인(郡夫人)[br]→ 정빈(貞嬪) → 수빈(粹嬪)[* [[이방원|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의 세자빈 시절 호인 정빈과 겹친다는 이유로 수빈으로 개칭됨.] || || '''전호''' ||모자전(慕慈殿) || || '''존호''' ||'''인수'''자숙('''仁粹'''慈淑) || || '''휘호''' ||휘숙명의(徽肅明懿) || || '''시호''' ||'''소혜왕후(昭惠王后)''' || }}}}}}}}} || [목차] [clearfix] == 개요 == '''昭惠王后 韓氏 소혜왕후 한씨 / 仁粹大妃 인수대비''' [[한확]]의 딸로, 추존 왕 [[의경세자|덕종]]의 아내이다. [[세조(조선)|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월산대군]]과 [[성종(조선)|성종]]의 어머니이다.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조선)|성종]]에 의해 의경왕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고, 이후 '''[[덕종(조선)|덕종]](德宗)'''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존봉되었다. 이후, [[성종(조선)|성종]]의 뒤를 이어 손자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엔 자숙이라는 존호가 더해졌으나 최초에 받은 존호 그대로 인수대왕대비로 호칭되고 있다. 사후 [[연산군]] 때에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친자매 간의 돌림자가 뫼 산山 자를 쓰는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이름이 0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편이 의경세자에서 의경왕으로 추존되면서, 작위로서의 왕비(인수왕비)에는 있었지만, 왕비의 통상적인 의미인 '임금의 아내(중전)'로는 지냈던 적은 없었고, 거의 대비로만 지냈다보니 대중에는 소혜왕후보다는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타 추숭 왕비들과는 다르게 인수대비와,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신정왕후)]]는 생전에 대비로서 왕후의 지위를 실제로 누렸다.]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의 친할머니이다.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막내딸인 [[공혜왕후]],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의 시어머니이다. == 생애 == === 세자빈이 되다 ===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문종 즉위년), [[세조(조선)|수양대군]]의 장남 [[의경세자|도원군 숭]]과 [[결혼|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시아버지 [[세조(조선)|수양대군]]이 [[단종(조선)|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양위]]받아 [[조선/왕사|왕위]]에 오르면서 [[의경세자|남편]]은 [[왕세자]]에 봉해졌고 그녀 역시 [[세자빈]]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남편 [[의경세자]]와 [[성관계|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결혼생활 5년 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대군]], [[명숙공주]](이경근), 그리고 훗날 [[조선왕조]]의 제9대 임금인 성종이 되는 [[성종(조선)|자을산군]]이다. ===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 [[성종(조선)|막내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경세자]]가 요절하였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한씨는 21살이었다.[* [[야사(역사)|야사]]에 [[단종(조선)|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자 이 말을 믿은 [[세조(조선)|세조]]가 [[현덕왕후|형수]]의 무덤(소릉)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역사)|야사]]와 달리 [[단종(조선)|단종]]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친 행위는 소문대로 실제 있었다.] [[세자빈]] 자리는 [[장순왕후|아랫동서]]에게, 남편의 [[왕세자|세자]] 자리는 [[예종(조선)|시동생]]에게 물려주고 한씨는 '정빈(貞嬪)'이라는 빈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 4살이던 장남 [[월산대군]], 2살이던 [[명숙공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성종(조선)|자을산군]]을 데리고 출궁하였다. 훗날 정빈이 [[원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자식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시부모인 [[세조(조선)|세조]]와 [[정희왕후]]는 농담 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대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조선)|세조]]는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차남인 [[예종(조선)|해양대군]]을 다음 [[왕세자|세자]]로 지목했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효종(조선)|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조선)|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조선/왕사|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왕위 계승의 법칙|적장자 상속제]]가 사대부는 물론 민간 까지 널리 퍼진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때는 이런 종법을 어겼어도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임금들은 [[문종(조선)|문종]]과 [[단종(조선)|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예종(조선)|해양대군]]이 [[월산대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대군]]의 [[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5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왕세자|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예종(조선)|해양대군]]은 8살, [[월산대군|월산군]]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비슷했다.] === 아들 자을산군, 성종의 즉위 === 수빈은 차남 [[성종(조선)|자을산군]]을 [[공혜왕후|한명회의 딸]]과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자성대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종(조선)|예종]]이 4살인 [[제안대군]]만 남기고 사망하자 권신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 자성대비의 지지를 받은 [[성종(조선)|자을산군]]이 즉위하였다. [[성종(조선)|자을산군]]이 숙부 [[예종(조선)|예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하여 [[조선/왕사|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남남인 백모와 조카 신분이 되었고, 이후 수빈은 [[성종(조선)|아들]]이 [[조선/왕사|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嬪)'''의 지위였다. [[성종(조선)|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면서 애매한 수빈의 지위에 관해 논의가 시작된다. [[예종(조선)|예종]]의 친자였던 [[제안대군]]은 [[세종(조선)|세종]]의 적7자인 [[평원대군]]의 봉사손(奉嗣孫)이 되면서 [[조선/왕사|왕위]]와 영영 이별하였다. === 왕대비가 되다 === 처음에는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지만 [[1471년]](성종 2년), [[성종(조선)|성종]]이 친아버지를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수빈도 대비가 되었다. [[예종(조선)|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인혜대비]]와 인수대비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성대왕대비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법적으로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 밝았기 때문에 자성대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자성대비의 [[수렴청정]] 시기 [[한글]]은 알지만 [[한문]]에는 밝지 못한 시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었다. [[유교]] 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시어머니 자성대비가 사망하자 [[조선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 인수대비의 여성관 === 이때 아들 [[성종(조선)|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인수대비가 평소에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만큼 성종의 치세 동안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금승법(禁僧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이다.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폐비 윤씨]] 사사를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조선)|성종]] 본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편을 들어 신하들에게 [[폐비 윤씨|윤씨]]의 폐위가 옳다고 밝혔고, 시어머니 자성대비 역시 언문 교지를 직접 내려 [[성종(조선)|성종]]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가엾게 여겼을 리는 절대 없다. 본인부터가 웬만한 선비들보다 예법을 잘 알았고 성종과 자성대비와 더불어 왕비를 폐해야 하는 이유를 들며 폐비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야사(역사)|야사]]에는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주도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널리 퍼져있다. [[성종(조선)|성종]]의 [[후궁]]인 [[귀인 엄씨]],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와 결탁하는 한편 [[성종(조선)|성종]]이 [[폐비 윤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령한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 윤씨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다. 이 [[야사(역사)|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조선)|성종]]이 [[폐비 윤씨]]를 그리워했다는 것인데, [[성종(조선)|성종]]은 [[폐비 윤씨]]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며 버럭 화를 낼 정도로 그녀를 매우 증오했다. [[폐비 윤씨]]의 두 차례 폐비 위기는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조선)|성종]]의 주도였다. 나중에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도 신하들의 동정론에도 불구하고 [[성종(조선)|성종]]이 결단하여 진행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와 [[성종(조선)|성종]]을 참조. === 연산군 즉위 이후 === [[1504년]](연산군 10년) [[1월 8일]], 인수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을 온 신하 박열을 통해 "내가 이미 늙었고 본 것도 많으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연산군|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饌]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고기|육선]][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를 전후로 대비의 건강이 위중하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남아있다. >[[연산군|왕]](王)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안양군|손]][[봉안군|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연산군|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안양군|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연산군|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폐비 윤씨|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엄씨]]·[[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갈|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야사(역사)|야사]] 중 이미 광분해 날뛰던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향해 뛰어가 머리 박치기를 하였고 그 충격으로 [[죽음|승하]]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단순한 [[야사(역사)|야사]]에 불과하다. 깊어진 병세에 정신적 충격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 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보이며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실록에 안 올렸을 리가 없다. [[연산군일기|실록]]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은 명백하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의 소생 [[안양군]]과 [[봉안군]]의 생 머리카락을 잡고 인수대비에게 질질 끌고 가서 "왜 제 [[폐비 윤씨|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나와 있다. 단순히 인수대비에게 언성을 높여 소리를 지른건지, 아니면 쌍욕을 섞어가며 [[패드립]]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연산군]]의 상태나 실록의 서술적 특징을 보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 [[인조실록]]이나 [[영조실록]]같은 경우 각각 며느리와 아들에게 하는 모진 말들을 가감없이 그대로 적는 것이 특징인데 그 정도가 너무 과한 경우 상황만을 간접적으로 우회하여 묘사하는 것도 또한 특징이다. 단순히 감정적인 투정으로 끝났다면 그 말들을 [[중종(조선)|중종]] 대에 들어서 사관이 안적었을리가 없다. 이날 [[연산군]]의 깽판은 [[연산군일기]],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다.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에 [[죽음|승하]]하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전엔 할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윤기무'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 전말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던지라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도 연로하신 분들 중에 정정하던 사람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급속히 건강을 해치거나 심하면 아예 세상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인수대비는 위에 나온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손자 [[연산군]]이 직접적으로 폭행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이 일이 인수대비의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극에서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 사후 === 일설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가진 원한이 깊어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전호]](殿號)는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나 지어올리는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보면 인수대비의 [[혼전]](魂殿)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정황상 인수대비의 혼전으로 보이는 모자전(慕慈殿)에 [[연산군]]이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지위를 격하하여 '''[[세자빈|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연산군]]이 "대행대왕대비께서는 곤위(坤位)[* [[왕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다.]에 계셨던 적이 없으니 [[세자빈|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맞지 않겠는가?"하고 하문하니 신하들이 [[연산군]]의 폭력적인 행동에 눌려있다가도 이것만은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유순(조선)|유순]]은 "그건 [[연산군|주상전하]]의 [[조선/왕사|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의경세자]]는 [[왕세자]]일 때 [[사망]]하였으니 당시에는 [[왕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으나,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는 이미 [[의경세자]]가 [[조선]]의 [[왕]]으로 추존된 이후다. 그러므로 인수대비의 장례를 [[세자빈]]의 예로 치른다면 [[의경세자]]까지 도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그렇게 되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조선)|성종]] 대부터 족보가 꼬이게 된다.]라고 아룄다. 그러자 [[연산군]]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의경세자]]보다는 높고 [[안순왕후]]보다는 낮게 행하라고[* 세자빈보다는 높고 정식 왕후보다는 낮게 치르라는 소리.] 분부하였으나 이것도 신하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결국 [[왕비|왕후]]의 예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상제(喪祭)를 단축하여 지내는 것을 밀어붙였고 반발에도 끝내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상제를 단축하여 지낸 것은 연산군이 처음이 아니었다. [[성종(조선)|성종]]도 할머니 [[정희왕후]]의 상제를 한 달로 단축해서 지낸 예가 있었는데, 보통 [[조선/왕사|국왕]]이 상제를 단축하려 한 뜻은 상제를 빨리 끝내야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 딱히 인수대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안순왕후]]의 [[장례식|장례]] 때는 13일 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인수대비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정희왕후|친할머니]]라고 조금 더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죽음|승하]]한 직후 상례를 의논할 때 [[세자빈|왕세자빈]]의 예로 치르자고 한 것을 보면 [[연산군]]이 조모 인수대비를 격하할 의도가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은 [[편집증]]이 의심될 정도로 계속 상제를 빨리 치러버리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의경세자|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왕세자|세자]]일 때 [[죽음|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죽음|승하]]했기 때문에 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인수대비가 [[죽음|승하]]한지 2년 후인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 사태가 벌어져 [[연산군]]이 왕위에서 강제로 쫓겨나 [[강화도|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지내다가 병으로 죽었다. == 가계 == * 친정([[청주 한씨]]) * 아버지 : 서원부원군(西城府院君) [[한확]](韓確)[* 덕종 [[의경세자]]의 장인어른이자, 소혜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서원부원군이란 직책은 '국구(國舅, 장인)'의 자격이 아닌 [[계유정난|반정]]으로 [[세조(조선)|세조]]의 즉위를 적극 도왔기에 그 공로로 받은 것이다.] * 어머니 :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홍씨]](南陽府夫人 洪氏) * 1남 : 한치인(韓致仁) * 2남 : 한치의(韓致義) * 3남 : 한치례(韓致禮) * 시가([[조선/왕실|전주 이씨]]) * '''시조부 : [[세종(조선)|세종]](世宗) 이도(李裪)''' * '''시조모 : [[소헌왕후]] [[청송 심씨|심씨]](昭憲王后 沈氏)''' * '''시아버지 : [[세조(조선)|세조]](世祖) 이유(李瑈)''' * '''시어머니 : [[정희왕후]] [[파평 윤씨|윤씨]](貞熹王后 尹氏)''' * 시누이 : [[의숙공주]](懿淑公主) * 매부 : 편정 하성위(褊玎 河城尉) 정현조(鄭顯祖) * '''시동생 : [[예종(조선)|예종]](睿宗) 이황(李晄)''' * 동서 : [[장순왕후]] [[청주 한씨|한씨]](章順王后 韓氏) * 조카 : [[인성대군]](仁城大君) 이분(李糞) * 동서 : [[안순왕후]] [[청주 한씨|한씨]](安順王后 韓氏) * 조카 : [[현숙공주]](顯肅公主) * 조카 : [[제안대군]](顯肅公主) 이현(李琄) * 조카 : 혜순공주(惠順公主) * '''배우자 / 자식''' * '''남편 : [[의경세자|덕종]](德宗) 이숭/이장(李崇/李暲)''' * '''1남 :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 며느리 : 승평부대부인 [[순천 박씨|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 서며느리 : ^^(측실)^^부부인 [[원주|김씨]](府夫人 金氏) * 서손자 : 덕풍군(德豊君) 이이(李恞) * 1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 사위 :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 * 외손자 : 공조참의(工曹參議) 홍백경(洪伯慶) * '''2남 : [[성종(조선)|성종]](成宗) 이혈(李娎)''' * 며느리 : [[공혜왕후]] [[청주 한씨|한씨]](恭惠王后 韓氏) * 며느리 : --제헌왕후--[[폐비 윤씨|폐비]] [[함안 윤씨|윤씨]](廢妃 尹氏) * '''손자 : [[연산군]](燕山君) 이융(李㦕)''' * 며느리 : [[정현왕후]] [[파평 윤씨|윤씨]](貞顯王后 尹氏) * 손녀 : [[순숙공주]](順淑公主) * 손자 : [[중종(조선)|중종]](中宗) 이역(李懌) * 서며느리 : [[귀인 엄씨|귀인]] [[영월 엄씨|엄씨]](貴人 嚴氏) * 서손녀 : 공신옹주(恭愼翁主) * 서며느리 : [[귀인 정씨(성종)|귀인]] [[초계 정씨|정씨]](貴人 鄭氏) * 서손자 :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 * 서손자 :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 * 서손녀 : [[정혜옹주]](靜惠翁主) * 서며느리 : [[귀인 권씨(성종)|귀인]] [[안동 권씨|권씨]](貴人 權氏) * 서손자 :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 * 서며느리 : [[귀인 남씨|귀인]] [[의령 남씨|남씨]](貴人 南氏) * 서며느리 : [[숙의 홍씨(성종)|숙의]] [[남양 홍씨|홍씨]](淑儀 洪氏) * 서손녀 : 혜숙옹주(惠淑翁主) * 서손자 : [[완원군]](完原君) 이수(李𢢝) * 서손자 :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 * 서손자 :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 * 서손녀 : [[정순옹주(성종)|정순옹주]](靜順翁主) * 서손자 :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 * 서손자 :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 * 서손자 : [[운천군]](雲川君) 이인(李寅) * 서손자 : [[양원군]](楊原君) 이희(李憘) * 서손녀 : [[정숙옹주(성종)|정숙옹주]](靜淑翁主) * 서며느리 : [[숙의]] [[진주 하씨|하씨]](淑儀 河氏) * 서손자 :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 * 서며느리 : [[숙의 심씨|숙의]] [[청송 심씨|심씨]](淑儀 沈氏) * 서손녀 : 경순옹주(慶順翁主) * 서손녀 : 숙혜옹주(淑惠翁主) * 서손자 : [[이성군]](利城君) 이관(李慣) * 서손자 : [[영산군]](寧山君) 이전(李恮) * 서며느리 : [[숙원]] [[경주 김씨|김씨]](淑媛 金氏) * 서손녀 : [[휘숙옹주]](徽淑翁主) * 서손녀 : [[경숙옹주(성종)|경숙옹주]](敬淑翁主) * 서손녀 : [[휘정옹주]](徽靜翁主) * 서손자 : [[무산군(왕족)|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 * 서며느리 : [[숙원]] [[파평 윤씨|윤씨]](淑媛 尹氏) == 기타 == * [[성종(조선)|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정왕후 조씨]]와 비슷하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 [[혜경궁 홍씨]]의 경우에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조선/왕실|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 때 장조)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 [[고종(대한제국)|고종]] 때의 일이다. 이 때 [[혜경궁 홍씨]]도 헌경왕후, 효강대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으나 [[사도세자|남편]]이 죽은지 100년, 홍씨가 죽은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 * [[불교]]를 신봉하면서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 전부 통달했다. [[여성]] 행동 교육서인 <내훈(內訓)>을 썼는데 <내훈>에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엄격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며느리의 위치가 보편적으로 이 정도였을 수도 있다. *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배우기 무척 어려운 [[언어]]이다. [[명나라]]를 통해 [[인도]]에서 불경 원본을 반입해 볼 수도 있었겠고 이를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왕비]]나 [[세자빈]]들도 [[한자]]를 못 읽는 경우가 많았고 산스크리트어 [[교육]]용 교재도 적었을 것이므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 인수대비의 큰 고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작은 고모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따라서 [[영락제]]와 [[선덕제]]는 인수대비의 고모부가 된다. 남동생 한치례(韓致禮)는 [[정의공주]]의 차녀와 [[결혼]]했다. == 대중매체에서 == 대중의 인식이 [[야사(역사)|야사]]에 편중되어 있어 [[정사(역사)|정사]]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세조(조선)|세조]] 때는 인수대비가 처세와 수완을 발휘했지만 [[예종(조선)|예종]], [[성종(조선)|성종]] 시절에는 아니다. [[국왕]]의 생모라는 지위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대비 [[이미지]]는 후대의 [[문정왕후]]가 더 어울린다. 성종이 어렸을 때 [[수렴청정]]은 정희왕후 몫으로 [[정희왕후]]를 보좌하는데 머물렀으며 스스로가 '여인은 정사에 깊이 관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성한 성종이 하는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극]]에서는 주로 야사의 모습으로 그려져 [[폐비 윤씨]]와 성종을 구속하며 망설이는 성종을 설득해 폐비 윤씨를 적극적으로 폐위시켰고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머리 박치기]]를 했다는 [[야사(역사)|야사]]가 정사처럼 널리 퍼져 있다. * 1962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1962)|연산군]]>에서는 배우 [[전옥]]이 연기했다. * 1962년 개봉한 영화 <[[폭군 연산]]>에서는 배우 [[전옥]]이 연기했다. [[파일:attachment/인수대비.jpg]]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는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배우 [[고두심]]과 배우 [[임영규]][* 배우 [[견미리]]의 전 남편이다.]가 각각 연기했다. * 1987년 개봉한 영화 <[[연산군(1987)|연산군]]>에서는 배우 [[정혜선(배우)|정혜선]]이 연기했다. * 1988년 개봉한 영화 <[[연산일기]]>에서는 배우 [[한은진]]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배우 [[김영란(배우)|김영란]][*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원경왕후]] 역,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신덕왕후]] 역.]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드라마 <[[장녹수(드라마)|장녹수]]>에서는 배우 [[반효정]]이 연기했다. [[파일:attachment/219.jpg]]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배우 [[채시라]][* 채시라는 당시에 30대 초반으로 저 모습으로 나온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다. [[드라마]]가 세조 때부터 시작해 무려 50년의 세월을 다루는지라 [[세조(조선)|세조]]의 며느리 때였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 중년~노년까지 다루며 중반쯤 되면 세조가 승하하는데 이 때쯤부터 대부분의 출연 분량은 약간의 [[분장]]을 한 중년 모습으로 나왔다. 저 [[사진]]의 모습은 연산군이 장성을 한 후반부인데 긴 드라마다 보니(186부작) 후반부만 해도 분량이 꽤 되지만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은 편.]와 배우 [[안재모]].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어미 잃은 [[연산군]]을 측은히 여겨 감싸안고 대성통곡하며 그 전에 [[폐비 윤씨]] 사사가 거론이 되었을 때도 사촌오빠 [[한치형]]이 "차라리 [[폐비 윤씨|폐비]]를 죽이지 말고 [[연산군|원자]]를 같이 폐위시켜 버리자"고 주장할 때 "엄연히 자신의 [[연산군|손자]]이고 [[죄]]도 없기 때문에 폐위시킬 이유는 없다"고 감싸주기는 한다. 극 중 보면 친할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친손자인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천한 [[핏줄|피]]가 흐르다"고 냉혹하게 운운하면서 [[엿]]을 먹이는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제대로 된 정을 보여주지 않고 심하게 갈군다. 이래서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볼 때마다 항상 위축되면서 우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죄인]]의 [[연산군|자식]]"이라고 [[낙인]]을 찍어 개망신을 주며 이는 [[세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한 뒤로는 [[연산군]]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할머니에게 항상 골탕을 먹이는데 온 [[힘]]을 집중한다. 하지만 [[성종(조선)|성종]] 승하 직후 [[연산군]]의 즉위마저도 저지시키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오죽하면 "[[연산군|세자]]를 즉위시킬 바에야 차라리 [[제안대군]]을 옹립하겠다"고 할 정도. 심지어 [[성종(조선)|성종]]이 [[죽음|승하]]하고 나서 연산군이 상주(喪主)로서 뒷처리를 해야할 때 굳이 [[사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연산군에게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 행사인 수륙제를 지내야 할 것"이라며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즉위를 윤허한다는 교지 역시 쉽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측근이자 사촌오빠인 한치형이 간곡하게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조선/왕사|왕위]]를 인정해준 것 뿐이고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문안 인사를 할 때 제대로 받지 않고 자신의 둘째 손자인 [[중종(조선)|진성대군]]만 편애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나마 이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았을 때는 [[무오사화]] 때 뿐.[* [[무오사화]]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 사건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찬탈자로 격하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역모에 준하는 사건인지라 세조의 맏며느리인 인수대비로서는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작심하여 [[선비]]들을 제대로 족쳐내려고 하자 "[[죄]]없는 선비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더 이상의 [[사화]]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자신의 [[왕권]]을 다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연산군]]은 아예 자신의 친할머니인 인수대비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깽판을 놓기 시작하는데 결국 인수대비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과 치열하게 대립하다 못볼 꼴 다보고 죽는다. 죽기 전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조선)|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조선)|진성대군]]을 [[중종반정|왕위에 올리라]]"고 암시를 주기도 한다. 죽고 나서도 자신의 손자인 [[연산군]]에게 온갖 방법으로 고인 [[드립]]을 당하는데 실제로 마지막 회에서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자신은 크게 웃으면서 덩실덩실 [[춤]]추며 "할머니,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내쫓고 [[중종(조선)|새 임금]]을 세웠으니 [[중종(조선)|새 임금]]인들 [[조선/왕사|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겠습니까?"라고 외치면서 매우 기뻐한다. [* 실제로 [[연산군]]에 이어 [[조선/왕사|보위]]를 이은 [[중종(조선)|중종]] 역시 박원종, 성희안과 같은 반정공신들의 압박에 못이겨 첫번째 왕비였던 조강지처 [[단경왕후]]를 7일만에 내쳐야 했으며 그 후로도 신하들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우유부단하게 행동한다.] * 2005년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에서는 배우 [[윤소정]]이 연기했다. 노년의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는데 [[갑자사화]] 당시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를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 이겨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일:attachment/인수대비_(6)_mimimi9295.jpg|width=600]]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는 배우 [[전인화]][* [[전인화]]는 <[[왕과 나(드라마)|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지만 사실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는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이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덜 화제가 된 감이 있다. 물론 [[전인화]]의 [[문정왕후]] 연기는 [[드라마]]가 끝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명연기였다. 바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뭬~~야?!!''' 이다.]가 연기했다. [[권력]]욕이 강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잘 연기해냈으며 나름대로 [[연산군]]과 사이가 좋고 연산군을 아끼는 편이다. 다만 계모 [[정현왕후]]와 단 둘이 있을 때 "[[연산군|세자]]는 [[폐비 윤씨|폐비]]의 소생"이라면서 내심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조선/왕실|왕실]]의 [[적장자|장자]]이자 [[조선/왕사|왕위]]를 잇는 [[후계자]]로서 우대는 해 주는 편. 물론 가끔 [[연산군]]을 붙잡고 [[잔소리]]로 갈굴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연산군]]이 [[학문]]을 게을리하거나 함부로 [[사화]]를 일으켜 조정 대신들 여럿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차원에서 [[왕족]]으로서가 아닌 [[가족]]으로서 하는 잔소리다. 실제로 자신이 아끼던 [[상궁]]을 잡아가려는 것을 말리려다 [[연산군]]에게 밀쳐져서 앓아눕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문병을 온 며느리 [[정현왕후]]에게 "[[연산군|주상]]의 폭정이 더 심해지면 [[중종(조선)|진성대군]]을 [[중종반정|옹립 하자]]는 말들이 들릴게요. 허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정현왕후|대비]]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죽기 직전 [[연산군]]과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이 "어찌 [[연산군|소손]]의 [[폐비 윤씨|어미]]를 그리도 미워하신 겁니까! [[연산군|소손]]을 [[조선/왕사|보위]]에 올리시고도 어찌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으신 겁니까! [[연산군|소손]]은 [[인수대비|할마마마]]가 원망스럽습니다!"며 슬퍼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 [[파일:attachment/a0106573_4ed84e37870cd.jpg|width=400]]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아이돌)|티아라]]의 [[함은정]], 이후에는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했던 배우 [[채시라]]가 연기했다. 2011년 JTBC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와 1998년 KBS <[[왕과 비]]>는 같은 [[작가]](정하연)와 같은 [[주인공]](채시라)이 참여했음에도 인수대비에 대한 작중 묘사가 크게 다른데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일개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가족]]이라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하는 냉혹한 면모를 지녔지만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비교적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면모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특히 [[연산군]]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 차이가 큰데 가령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어린 [[연산군|연산]]을 매우 귀여워하고 어린 연산의 [[장난]]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며 같이 [[잠]]을 자며 보살필 정도로 각별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폐비 윤씨]]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린 연산까지 목숨을 잃을 것이 우려되어 못내 망설여 권신 [[한명회]]에게 방법을 묻기도 한다. 아마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1998년]] <[[왕과 비]]> 방영 당시와 어느 정도 달라진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보니 [[과거]]에 <[[왕과 비]]>를 본 [[시청자]] 입장에서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를 본다면 가히 [[충격과 공포]]를 느낄 정도.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조선)|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에게도 제법 거칠게 대했음은 물론이고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세웠다가 가차없이 [[토사구팽]]을 해버린 반면에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공혜왕후]]에게 친근하게 대해줬으며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세우자는 시어머니 [[정희왕후]]에 맞서서 처음부터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세우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 2017년 [[MBC]]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서는 배우 [[문숙]]이 연기했다. == 관련 문서 == * [[귀인 엄씨]] * [[귀인 정씨(성종)|귀인 정씨]] * [[내훈]] * [[묘법연화경(보물 제1196호)]] * [[불교]] * [[불조역대통재]] * [[서오릉]] * [[성종(조선)|성종]] * [[세조(조선)|세조]] * [[수종사 종]] * [[언해관음경아미타경]] * [[연산군]] * [[연산군일기]] * [[육경합부]] * [[의경세자|덕종]](의경세자) * [[정현왕후]] * [[정희왕후]] * [[중종(조선)|중종]] * [[중종반정]] *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불좌상]] * [[폐비 윤씨]] * [[갑자사화]] [[분류:1437년 출생]][[분류:1504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왕비]][[분류:청주 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