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당송팔대가)] ||<-2> {{{#ece5b6 '''{{{+1 북송의 대신[br]소동파(蘇東坡)[br]{{{+1 蘇軾 | 소식}}}}}}'''}}} || || '''[[시호|{{{#fff 시호}}}]]''' ||문충(文忠) || || '''{{{#fff 최종직위}}}''' ||태사(太師)^^추증^^ || || '''{{{#fff 이름}}}''' ||소식(蘇軾)[*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Sū Shì이다.] || || '''{{{#fff 자}}}''' ||자첨(子瞻) || || '''{{{#fff 호}}}''' ||동파(東坡) || || '''{{{#fff 부친}}}''' ||[[소순]](蘇洵) || || '''{{{#fff 생몰}}}''' ||1037년[* 음력 으로는 1036년 12월 20일 묘시(卯時) 생이다.] ~ 1101년 || || '''[[주군|{{{#fff 주군}}}]]''' ||[[신종(송)|송신종]][br][[철종(송)|송철종]][br][[휘종(송)|송휘종]] || || '''[[국적|{{{#fff 국적}}}]]''' ||북송(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北宋)의 [[시인(문학)|시인]]이자, 학자, 정치가. 미주(지금의 [[쓰촨성]]) 미산 출신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소식이란 이름보단 성씨에 호를 붙여서 부르는 방식인 '''소동파'''로 더 잘 알려져있다.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시인)|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후한대부터 산문(수필)에 유미주의적인 풍조가 만연하자, 문장은 [[진(통일왕조)]] 이전의 글이 그러하였듯이 그 내용에 도리(道理)를 품고 있어야 한다며 고문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 [[당(통일왕조)|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s-3]] [[구양수]](歐暘修), 소순,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소식, 소철.]의 한 사람이다. [[신기질]]과 함께 호방파의 주 시인 중 하나로, '''소신'''이라고도 불렸다. == 생애 == 22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직후 모친 상(喪)을 치러야 했고, 또 그 직후엔 상경하고 얼마 안 되어 아내와 부친 상을 치러야 해서 또 낙향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과거 합격 당시, 야사에서는 차석으로 급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시험관이자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구양수]]가 소식의 글을 보고 "이건 내 애제자의 글이 틀림없다. 훌륭하지만, 이걸 장원 줬다간 부정 의혹이 일 수가 있다."해서 차석으로 줬다고 한다. 당시엔 부정 채점을 막기 위해서 시험관들이 채점할 땐 답안지의 이름을 가리고 했었다. 이후 3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는데, 이때는 마침 [[송신종]]의 시대로 [[왕안석]]의 신법 운동으로 인해 조정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때였다. 소식은 국가 정책의 개선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왕안석의 세력을 구성하는 인물들의 위선과 속됨 때문에 왕안석 본인에게도 의심을 품고 있었고, 또한 급격한 개혁은 오히려 국정에 혼란만을 가중시킬 것이라 우려했다. 일반적으로 소식을 구법당의 일파로 보지만, 그는 구법당의 의견에도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소수파였다. 실제로 후에 구법당이 신법을 일괄적으로 폐지하려 하자, 그는 일부 법은 존속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문장력을 총동원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황제를 설득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오랫동안 지방을 전전했다. 이 과정에서 부임지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해 명성을 얻었으며, [[남송]] 수도가 될 임안(지금의 [[항저우]]) 지사로 가서 임안을 더 발전시키고 온다. [[동파육]]에 대한 고사(故事)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그러다 1079년에 지방의 실태를 올린 상소가 신법당 일파의 눈에 거슬려(이때 왕안석은 실각한 상태였다) 파직당하고 문초까지 받았으나, [[송태조|태조의 유훈]][* "선비를 사화(士禍)로 해치지 마라."]도 있고 하여 간신히 목숨은 건져 유배형을 당했다. 이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신선]] 사상 등에도 심취했다고 한다. 후에 신종이 죽고 구법당이 집권하면서 소식은 예부상서로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이미 신법의 유효성 여부는 안중에도 없이 권력쟁탈의 빌미로만 이용하는 조정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고, 특히 당시 세를 불려던 성리학자들과 사이가 나빠져 또 귀양을 당했다. 훗날 [[성리학]]을 숭상하는 이들이 이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소식의 시를 추앙한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 참고로, 이때 유배된 곳이 [[하이난|해남]]인데 소식 덕분에 해남에 학문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전까지 해남 출신들은 과거를 본다는 것 자체도 생각지 못했는데 소식이 가르친 제자들 몇이 해남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 뒤 [[송휘종|휘종]]이 즉위하면서 사면받아 상경하던 도중에 병으로 [[객사]]하였다. 소식 사후 26년 뒤, [[고종(송)|고종]]은 소식을 태사(太師)로 추증하고, 소식의 손자인 소부(蘇符)를 예부상서로 삼았다. 또한 [[효종(송)|효종]] 시기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여담 == [[설니홍조]]라는 사자성어와도 연관이 있다. 소식이 [[소철(시인)|소철]]에게 보낸 답시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가 신법에 반대했던 사실을 두고 여러가지 얘기가 난무한다. [[왕안석]]을 지지하는 측은 그가 지방을 전전하던 과정에서 신법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향했노라 하는가 하면, 반대로 [[사마광]]을 지지하는 측은 오히려 지방 생활 중에 신법의 폐단을 보았으며 왕안석 일파의 위선을 두고 분통을 터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예술가로서, 또한 백성을 위해 일한 관리로서 모든 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움직였을 따름이다. 시인 뿐만 아니라 [[서예]]가로도 당대제일로 평가받아 미불(米芾), 황정견(黃庭堅), [[채경(북송)|채경]](or 채양)과 함께 북송 사대가로 손꼽히기도 한다. 서예는 처음 『난정서』를 배우고 안진경의 서예에서 인간성의 발로를 발견하였으나 후에 고인의 모방을 배척하고 일가를 이룬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한반도를 비롯한 다른 주변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규보]]는 "학자들이 과거(科擧) 공부할 때는 풍월에 눈돌릴 틈이 없다가, 급제하고 나서 시 짓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선 소동파의 시에 푹 빠져버린다"라고도 했다. 시인으로 유명한 소식은 관료로서도 유능한 점이 있는데 바로 [[치수]] 사업을 맡으면 매우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홍수 등 물에 관련한 운영, 관리는 고대 중국 관료에겐 매우 필요한 기술이자 강력한 무기였는데 소식은 이 부분에서 아주 유능하였고 이로 인해 자주 탄핵당해 [[유배]]나 낙향을 전전해도 조금있으면 계속 다시 불려와 지방관 등 관료를 맡아 활동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부식]]의 이름 중 '식'(軾)이 소식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동생 이름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蘇轍)로부터 이름을 딴 김부철이다. [[사(문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사는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인 정서가 주축이었는데, 남성적, 서사적 정서를 가진 사를 새로 지어 사의 주제가 풍부해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식의 사는 음악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수호전]]로 유명한 간신 [[고구]]와 연관이 있다. 원래 고구는 소동파의 서기였는데 글을 잘 써서 소동파가 잘 대해주었고, 후에 권력을 잡게 된 뒤 고구도 소동파의 가족을 잘 돌봐주었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 대한 견해에선 [[조위정통론|위진정통론]]을 주장하였는데, 그러면서도 [[공융]]을 영웅으로 높게 평가하여 조조는 음험한 도적이자 이리같은 자로 평생 [[유비]]를 두려워 하였고 유비는 공융이 천하에 자신이 있음을 알아준다는 것에 기뻐하였다, 하늘이 만약 한나라에 복을 내려 공융 곁에 유비가 있었다면 유비가 조조를 베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소식의 정통론이라는게 삼국 전부 정통성도 없고 도덕도 없어 누구도 천하통일 못했으니 힘쎈놈이 정통이다 이 수준이라... [[복어]]를 좋아해서 죽음과도 바꿀 맛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심괄]]과는 동료 관계였다. 그러나 소식이 신법에 반대하여 유배되자 심괄이 그를 임안으로 찾아와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 심괄이 소식을 모함하였고, 소식은 심괄을 뼈속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 === 동파육 개발? === 설에 따르면 한 요리의 개발자이기도 한데, 바로 중국요리 중 가정식이지만 한국의 중국집에서는 고급식당이 아니면 보기 힘든 음식인 [[동파육]](東坡肉)이 소식이 만든 요리라고 전해진다. 돼지고기의 삼겹살이나 오겹살을 간장을 베이스로 한 소스에 졸여서 만드는 조림과 수육 중간 정도의 음식인데, 저장성 항저우와 상하이 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요즘은 인터넷에 만드는 법이 상세하게 올라와 있어서 우리나라 일반 가정에서도 잘 따라만 하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동파육의 기원에 대해선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 어떤 기원이든 소식과 연관되었다는게 정론이다. 아래의 내용은 동파육의 기원 중 비교적 잘 알려진 내용 하나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요리의 원형은 빨갛게 구운 고기라는 뜻의 '홍소육(紅燒肉)'으로, 동파육처럼 돼지고기 삼겹살 부위나 양고기로 만들긴 하지만 간장소스가 가미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식은 1077년 서주의 지주(知州)[* 주의 1급 행정관. 오늘날 도지사와 비슷한 벼슬이다.] 시절 홍수가 나자 백성들을 이끌고 제방을 쌓는 [[치수]] 사업을 진행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 민심을 안정시키고 인망을 얻었다. 백성들은 감사의 뜻을 담아서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바쳤는데, 소식은 입맛이 까다롭고 미식가였으며 자기가 만든 요리를 나눠주는 취미도 있었기 때문에 그 고기들로 홍소육을 만들어 백성들과 나눠 먹었다. 자신들이 선물한 고기를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다시 베풀어 준 소식의 인간적인 면에 반한 백성들은 그 홍소육을 '고마운 마음이 담긴 고기'라는 뜻으로 회증육(回贈肉)이라고 불렀고, 이 요리는 서주의 인기 요리가 되었다. 3년 뒤인 1080년, 소식은 조정을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황주에 유배되었다. 따로 사람을 부릴 수도 없는 유배인의 신분이라 소식은 내가 바로 요리사!라는 심정으로 손수 밥을 해먹고 지냈다. 이때 돼지고기로 홍소육을 즐겨 해먹었는데 요리법을 바꿔서 약한 불에 적은 물로 푹 삶는 수육스타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요리법을 시로 적었는데 이 시가 바로 '식저육(食猪肉)'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다시 9년이 지난 1089년, 황주 유배를 마치고 관직에 복귀한 소식은 절강성 항주(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의 지주로 부임하여 폭우로 범람한 태호(太湖)로 침수피해를 입은 민생을 구제하고,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는 치수 사업을 통해 미리 침수를 막았다. 위에 설명대로 중국의 관료의 통치덕목에 꼭 들어가는 것이 물을 다스리는 치수사업인데, 소식은 이 치수사업에 매우 일가견이 있었던 것이다. 소식 덕분에 폭우에도 호수 범람 우려없이 무사히 살게 되자 백성들은 소식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때마침 전에 서주에서 살았던 사람이 예전 소식이 백성들과 함께 홍소육을 만들어 먹었는데 소식이 그 요리를 아주 좋아한다고 --꿀팁을 전수했다--가르쳐줬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소식에게 돼지고기를 선물하자, 늘 먹던 홍소육에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던 소식은 돼지고기 덩어리를 네모나게 잘라 찜통에 넣고 간장 양념을 해서 삶아보았다. 먹어보고 맛이 괜찮자, 소식은 바로 그 요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백성들을 잘 돌봐주는 데다 이렇게 맛있는 요리까지 만들어주는 소식의 유능함과 덕을 기린 백성들은 그 요리를 소식의 호를 따서 동파육이라고 이름짓고 항주의 대표요리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동파육이 항주 저잣거리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본 소식의 적대세력들이 이를 와전시켜 소식이 백성들에게 동파육을 강제로 팔아 이득을 챙기고 있다고 탄핵했다. 더 큰 문제는 무능한 송나라 조정이 진상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적대세력의 탄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 이 때문에 소식은 또다시 해남(海南, [[하이난]])으로 유배를 떠났다. 백성들은 기껏 좋은 어르신을 만나 큰 덕을 입었는데 갚지도 못했다며 미안해 했고, 대신 소식이 가르쳐준 요리법을 지켜 동파육을 항주의 명물로 대대손손 전수했다. 덕분에 소식이 죽고 송나라가 망하고 다시 원명청의 왕조를 거쳐 1956년에 정부로부터 항저우를 대표하는 36대 요리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 고려에 대한 시각 === >貊賊 入貢 無絲髮利 而 有五害 今請 諸書 與 收買 金箔 皆 宜勿許。 >[[예맥|맥적]][* 맥적(貊賊, 적은 도적 적 자다.)은 북방 이민족인 [[예맥|맥족]]을 뜻하며, 대표적으로 [[고구려]]가 이에 해당한다. 소동파의 이 대사에서는 맥족의 후예인 [[고려]]를 낮춰 부르는 용도로 사용했다.]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백성들이 힘들고,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고,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고려와의 관계가 거란이 트집잡을 거리가 된다는 것이란 다섯가지.]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여러 서책과 더불어 거두어 사가는 금박 모두 마땅히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고려가 조공을 바치면서 사신이 폐백을 관리에게 보냈는데, 글에서 갑자를 칭하였다. 소식은 이를 물리치며 “고려가 우리 조정에 칭신하면서 우리의 책력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이걸 받겠는가!”라고 말하였고, 사신이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북송 [[신종(송)|신종]]의 재위기 중 1068년부터 1077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이라고 칭하자, 그러한 뒤에 받았다. >- 《[[송사]]》, 소식전 중국에서 위인이자 [[시인(문학)|시인]]으로 알아주는 인물이지만 [[고려]]를 천한 나라라고 하는가 하면[* 하지만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구경하였으면 원이 없겠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고 하면서 [[금강산]]에 대해선 극찬을 했다고 한다. 물론 소동파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태종(조선)|태종]] 4년 9월 21일 己未 1번째 기사에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꼭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하며, 고려에서 태어나 친히 [[금강산]]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親見金剛山)라는 말이 중국에 있을 정도다'고 하므로 꼭 소동파가 아니라도 저런 명성이 중국에 어느정도 퍼져 있었다는 것 자체는 분명해 보인다.] 고려에 대한 서책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연호]]도 송나라와 다른 연호를 쓰며 멋대로 [[외왕내제|고려 황제]]를 칭한다고 말이다. 한편, 서책 수출을 반대한 데에는 송의 [[대외관계]] 탓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사방에서 틈만 나면 송을 뜯어먹으니, 그런 나라 사정 속에선 고려도 위험한 예비 적성국가로 보였을 법하다는 것. 실제로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왔을 때 엄청나게 [[디스]]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요나라에 하도 치인 탓에 고려를 홀대할 수 없었던 송나라의 사정상, 의천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 했다. 다만 당시 송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소동파의 주장도 아예 일리가 없진 않았다. 실제 당시 송은 요와 중원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문종 ~ 숙종에 이르기까지의 고려는 이런 요와 송 사이에서 간을 보며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당대 중국에서 고려가 수십만 대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있다. >"당나라 고종이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고구려 당시)는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고려 인종 원년)은 전대에 비해 또 배가 늘어났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1권 의장과 호위 中> 요든 송이든 중원을 노리는 상황에서 고려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고려를 도모하기엔 송은 [[황해]]가, 요는 [[천리장성]] 때문에 장기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상황은 송-요가 단독 1위를 노리는 공동 1위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가진 2위 고려가 양쪽 모두에게 [[을질]]을 하고 있었던 [[천하삼분지계]][* 중원을 기준으로 서방도 포함하면 [[서하]]까지 4강 체제 → (고려·거란·송/서하) 혹은 (거란·송/고려·서하)]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송이나 요나 고려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송의 재정과 품위에 꽤나 부담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신들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인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조공품은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서 하사품은 10배로 뜯어가거나, 이 하사품을 개봉과 항주 같은 대도시에서 바로 금과 은으로 바꿔서 가져가거나, 군사기밀인 지도를 비롯해 황실에만 있는 희귀도서들을 달라고 하거나, 황제에게 입시하기 전에 다른 사신들[* 서하, 일본, 남만, 요 등.]과 먼저 만나 접대를 받거나 하는 등 [[안하무인]]적 행태를 보여줬다.[* 괜히 북송 시기를 다루는 [[포청천]] 드라마에서 고려태자의 깽판 같은 에피소드가 나오는게 아닌 것이다.] 허나 당시 국제관계상 송은 고려를 어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송나라 군사력으로는 [[요나라]]나 [[금나라]]에 대항하기 힘들었기에 [[고려]]가 반드시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야만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원교근공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열불은 나고 고려가 사실상 주는건 없는데 달라는 것만 많다는 식으로 깐 것. 위의 의천 사례만 봐도 소동파 입장에선 [[북송]]이 고려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이런 감정을 고려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고려는 송보다 상대적으로 가기 편한 요에 더 많은 조공을 했고, 이는 바꿔 말하면 더 많은 하사품을 요로부터 가져왔다는 소리기도 하다. 이때 요나라 지도도 구해와 송에 공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반대파들에게 자신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바다를 끼고 멀리 있는 고려보다 가까이에 있는 서하나 요에게는 맥적은커녕 찍 소리도 못하지 않느냐며 소식을 공격했다. 고려는 서하나 요처럼 수십만 세폐를 받고 송을 상국으로 모시는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송의 아우를 자처하며 여러 차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고생이 심한 아우가 형에게 하소연을 하고 투정을 부린다고 형이 동생을 멸시한다니 말이 되느냐고 것이다. 오히려 소식의 발언이 고려 사신들의 귀에도 들어가 고려 조정이 불만스러워한다고 따졌다. 소식은 고려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백성들이 힘들뿐더러,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고,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송-고려 관계가 거란이 트집거리가 된다고 주장했는데, 반대파들은 그런 다섯 가지는 서하나 요도 모두 한다고 반박하였다. 특히 소식이 주장한 것처럼 요가 트집 잡을 게 두려워 고려와 관계를 끊었을 때 요가 침공한다면, 우리 손으로 관계를 끝내버린 고려가 과연 우리를 도와줄 것 같느냐고 피반하였다. 고려와 관계가 단절되면 요는 반드시 침공할 터인데, 군사적으로 요의 침공을 막거나 외교적으로 침공을 막는 방안을 제시해보라고 하자 소식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소식의 반대파들은 소식이 고려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하지만, 고려는 세폐를 받지도 않을뿐더러 송의 경제적 불안은 서하와 요가 매년 받는 수십만의 세폐 때문인데, 정작 서하와 요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송에 우호적인 고려를 맥적으로 멸시하며 송에 우호적인 나라를 적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이유를 들어 소식을 서하나 요의 첩자로 몰아갔다. 소식 반대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기에 소식은 자신이 아둔하여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며 황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소식으로 인해 감정이 상했을 고려인들의 마음을 다독이라며 의천의 개인 가이드를 하라는 명을 받고 임한 것이다. 반대파들이 소식을 비판한 부분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것이다. 송을 호시탐탐 노리는 서하와 요에게는 찍 소리도 못하면서, 서하와 요가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고려가 송에게 자세를 낮춰 우호적으로 나오니 만만하게 보고 맥적으로 멸시한다며 소식을 글만 잘쓰는 위선자로 공격한 것이다. 실제로 소식은 고려를 맥적으로 멸시했는데, 이 때문에 고려와 송의 우애가 균열이 갈 듯한 분위기가 되자 송나라 조정이 소식을 좌천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후 소식은 지방으로 전전할 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국제정세 상 고려와 협력해야 하는 송나라 입장 상 소식의 발언은 위험한데 눈치 없이 고려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성 발언을 하다가 자기 나라에서 소식을 위험요소로 보고 지방으로 쫒아낸 것이다. 즉, 글 솜씨와 달리 눈치가 영 없었던 것. 한편, 이러거나 말거나 정작 소식은 고려인이나 후세의 조선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 고려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시는 모름지기 소식과 황정견을 모범으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한 33명을 가리켜 삼십동파출[* [[이규보]]의 답전리지론문서에 나오는 문구.]이라고 할 정도로 소식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현대에선 그저 고려를 깐 인물 정도로만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시인 [[이은상(시인)|이은상]]도 [[수필]] 소동파에서 어느 식당에 가니 [[적벽부]]가 적힌 시를 [[액자]]로 매달고 있어서 소동파가 고려를 혐오하던 자인데 이게 뭔짓이냐고 호통치자 [[식당]] 주인이 놀라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인줄 몰랐다며 액자를 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리도 고려를 혐오했는데 고려나 현대 한국에선 여전히 소동파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이냐고 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제 식민지 체제를 살았던 이은상은 식민지 체제에 협조적이었지만 한민족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식민지기 [[민족주의]]자 중 민족의 존속과 민족국가 건설([[독립]])을 별개로 여겼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식민지 체제에 협조]]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고려에 대해 반목하는 감정이나 혐오 성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덮어놓고 고려를 싫어한 건 아니다. 고려의 외교 스탠스도 소동파나 송나라의 입장에서 보기에 꽤나 '''진상 짓'''을 했다. 실제 소동파가 고려를 마냥 혐오한 사람은 아니었다. 기록을 보면 그의 제자인 장뢰가 당시 송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고려 부채[* 소나무로 만들어 부드럽고 고풍스러워서 중국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를 구해 주자 고려 부채를 칭찬하는 시를 짓기도 한 걸 보면 '고려'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단, 당시 고려 조정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대에도 타국 정부는 싫어도 그 나라 문화나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것처럼 소동파도 비슷한 스탠스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소동파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종류의 민족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송나라와 요나라, 고려가 서로를 다른 주체로 인식하는 등 민족 구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나, '민족 단위의 국가를 설정하고, 민족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로 국민의 개념을 정의하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민족주의]]는 분명한 [[근대]]의 산물이다. 즉 소동파가 고려를 욕했다고 하여 그것이 현대의 [[반한]] 혹은 [[혐한]] 감정과 같은 것은 아니며, 현재의 정치 지형에 입각하여 이를 해석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 사람의 사고를 판단하고 단정짓는 건 함정에 빠지는 길일 수 있다. 물론 그가 근대적 민족의식 대신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 중화 대 오랑캐, 문명 대 야만의 관점)을 지녔을 수는 있겠다. 소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범조우(范祖禹, 1041~98)의 글과 소식의 글을 비교해 보자. >저들이 비록 이적(夷敵)이지만 역시 중국의 백성과 같다. 오랑캐는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하며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니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 >- 범조우의 <당감(唐鑑)> 권3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금수와 같아서 너무 잘 다스려지기 바라면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만다. >- 소동파 전집 류종목 교수(서울대)는 이러한 관점차의 이유를 소동파의 열등의식에서 찾는다. >송나라는 다른 이전의 중국 왕조에 견주면 문약(文弱)하기 짝이 없었다. 늘 요나라(거란)과 서하(西夏)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소동파는 송나라의 ‘대외적 열등감’을 해소하고 싶은 복합심리에서 지나칠 정도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진 것은 아닐까.[* [[https://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1401281141111|'혐한파' 소동파를 짝사랑한 고려]] 기사에서 재인용] 하여간 이러한 소동파 본인의 성향과 별개로 그의 한시가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향을 이유로 그의 업적을 굳이 절하할 필요도 없다. 작가 본인의 행보와 문학적인 성취는 별개로 봐야 한다. 그런 만큼 순수하게 시로서 좋아하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 대중매체에서 == 2020년 드라마 청평악에 등장한다. 동생 소철과 과거시험을 위해 상경했다. 과거시험에서 장원이었으나 지공거인 구양수가 소동파의 답안을 보고 글의 수준과 문체가 자기 제자가 확실하다며 채점논란을 피하기 위해 방안으로 합격시켰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가)] ---- [include(틀:송사)]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소식, version=52)]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36년 출생]][[분류:1101년 사망]][[분류:메이산시 출신 인물]][[분류:중화권 시인]][[분류:중국의 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