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사)] [목차] [clearfix] == 개요 == {{{+1 蕭遜寧}}} (? ~ 997) [[요나라]](= [[거란]])의 [[장군]]으로 본명은 '''소항덕'''(蕭恒徳) 또는 '''소긍덕'''(蕭恆德)이었다. 한국에서 부르는 소손녕의 '''손녕'''(遜寧)은 소항덕의 [[자(이름)|자]]로,《[[고려사]]》에서 본명이 아닌 '''소손녕'''으로 나오기에 이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비슷한 예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 때 [[한반도]]로 온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도 있는데, '''정방'''(定方)은 자(字)이고, 본래 이름은 '''소열'''(蘇烈)이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거란]]의 최고 [[명장]]인 [[야율휴가]]^^(? ~ 998)^^라는 사람의 자도 '''손녕'''이었다. [[한자]]까지 遜寧으로 같다.] 가족 중에 형으로 [[제3차 여요전쟁]]때 거란군 사령관이었던 [[소배압]]이 있다. == 생애 == [[983년]] 거란 야율씨 [[황실]]의 황녀인 월국공주[* 월국공주 야율씨는 제5대 [[경종(요)|경종]]과 [[예지황후]](승천황태후) 소작 사이의 딸이었다. 따라서 제6대 [[성종(요)|성종]] 야율융서의 누이였다.]를 아내로 맞아 제5대 황제인 [[경종(요)|경종]]과 [[예지황후]], 즉 승천황태후 소작의 [[부마]]가 되었으며 이후 동경유수가 되었다. 그래서 소배압과 소손녕은 형제이자 동서이기도 했다. 소손녕도 형 소배압처럼 [[북송]]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력을 쌓았는데 중요한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두고, [[986년]]에 벌인 북송과의 전쟁에서 선봉대가 되어 성을 함락시켰으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당시 [[성종(요)|성종]]의 모후로 [[섭정]]이었던 [[예지황후|승천태후 소작]][* 소배압과 소손녕 형제의 고모였다. 즉 성종 야율융서에게는 소씨 형제가 이종사촌들이었다.]은 직접 소손녕을 문병하고 약까지 직접 내려주었다. 회복한 뒤에도 북송과의 전쟁때 계속 선봉에 나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고모인 승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993년]] [[제1차 여요전쟁]]이 시작되면서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봉산 전투''') 남하하다가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와 [[유방(고려)|유방]] 등의 분전으로 패배한 후, [[서희]]와의 담판으로 철군했다. 이때 소손녕은 자신의 부대가 800,000명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사실 거란의 군 편제상 그의 휘하 부대가 그 정도의 대군이었을리는 없다. 정확한 [[병력]]수가 사서에는 없지만 거란군의 경우, 원정을 할때 총사령관급인 '도통'을 두는데 소손녕은 당시 도통도 아니었고, 도통이 없는 거란군은 대개 [[기병]] 60,000명 미만이었으니 '''실제로는 최대로 잡아도 60,000명이었을 것이다.'''[* [[안주섭]]의 저서인《[[고려거란전쟁]]》에서 발췌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0 하나는 빼야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당시 거란군은 이렇다 할 [[영토]]나 요충지도 점령하지 않고서 다짜고짜 "항복하라"는 공갈포를 쳤지만 이때 소손녕의 이 말이 허풍임을 서희 혼자만 간파했고, 고려 조정은 대부분 [[평양시|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면서 항복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할지론''') 그러나 때마침 안융진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자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고, 마침내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서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강동 6주]]'''라는 요충지를 고려에 넘겨주어 이후의 전쟁에서 거란군이 고전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납득해 자신이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해서 서희에게 7일 동안 잔치를 베풀며 [[낙타]] 10두, [[말(동물)|말]] 100필, [[양(동물)|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줬다. 아무래도 문무를 겸비한 형 소배압과는 달리 나름 무용은 있었으나 [[정치]]와 [[전략]]을 생각하는 머리는 모자랐던 듯하다고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 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정치]] / [[외교]]적인 현안을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사령관]]급의 고위 관료가 정세 판단을 잘못하면 무의미한 [[전투]]에 휘하 장병들만 갈아넣는 상황이 된다.]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요사]]》에서는 >"[[성종(고려)|고려 왕 왕치]]가 항복하므로 땅을 떼어 주었다." 라고 기록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이 고려 원정을 공적으로 평가했는지 성종 야율융서 치세하의 거란 조정으로부터 '계성갈력[[공신]]'(啟聖竭力功臣)의 칭호를 받았고,([[994년]]) 그 뒤 화삭노(和朔奴)라는 장군의 휘하에서 옛 [[발해]] 유민들의 세력인 [[올야국|올야(兀惹) 정권]]에 대한 원정에 참전했다. 당시 올야국은 거란군과 싸우기 전에 항복했으나 소손녕이 항복한 올야인들을 [[포로]]로 취급하고, 함부로 다뤄서 올야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화삭노는 퇴각을 생각했으나 소손녕은 공을 세우기 전에는 퇴각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화삭노는 동남 방향으로 진격해서 고려와의 북쪽 경계까지 이르렀으나 식량 보급도 끊기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대올야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 책임을 물어 소손녕은 작위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도 [[996년]]에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에 올라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공략했다. [[997년]] 아내인 월국공주가 병에 걸리자 장모이자 고모인 승천태후 소씨가 현석(賢釋)이라는 [[궁녀]]를 보내 간병을 시켰는데 소손녕이 이 궁녀와 [[간통]]을 하게 되었다. 쇠약해져 있었던 월국공주는 이를 알고 분에 못 이겨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듣고 격노한 승천태후가 사위이자 조카였던 소손녕을 잡아서 처형했다.[* [[채널A]] <[[천일야사]]> 제149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소손녕이 너무 젊게 나왔던 데다가 본명인 '소항덕'으로 나왔다.] 사후에는 '''난릉군왕'''(蘭陵郡王)에 추봉받았고 아들인 소필적(匹敵)이 소손녕의 뒤를 이어 '난릉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역시 공주와 [[결혼]]했다.[* 훨씬 뒤의 일로 요성종의 붕어 이후 측실이자 [[흥종(요)|요흥종]]의 생모인 소누근이 정실황후인 소보살가를 모함하여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소필적은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함께 죽을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부인이 여진 땅으로 도망가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이 비참한 [[최후]]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제1차 여요전쟁 이후 회군한 뒤, 800,000명을 이끌고 갔다가 땅만 떼주고 왔다며 격노한 [[성종(요)|요성종]]에게 맞아 죽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 대중매체 == *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17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고 한다. * 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지대한]]이 맡아 연기했다. [[분류:997년 사망]][[분류:요나라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