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왕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진흥왕의 제2비[br]{{{+1 소비 부여씨 | 小妃 扶餘氏}}}'''}}}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29D9D, #25B4B4 20%, #25B4B4 80%, #129D9D); color: #fbe673" '''{{{#fbe673 백제 성왕의 왕녀}}}'''}}} || ||<|2> '''출생''' ||[[생몰년 미상|미상]] || ||[[백제]] || || '''사망''' ||[[생몰년 미상|미상]] || ||<|2> '''재위기간''' ||'''{{{#fbe673 신라 소비}}}''' || ||[[553]] [[10월]] ~ ?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성씨)|부여]] || || '''부모''' ||[[성왕(백제)|성왕]] || || '''부군''' ||[[진흥왕]] || || '''봉작''' ||'''소비(小妃)''' ||}}}}}}}}}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제]]의 공주이자 [[신라]]의 왕비. [[성왕(백제)|성왕]]의 딸, [[진흥왕]]의 [[차비|소비]](小妃, 작은 왕비). == 행적 ==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 하류를 빼앗긴 직후, 553년 10월, 백제 성왕은 딸(소비 부여씨)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진흥왕은 그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 이미 진흥왕에게는 [[사도부인]]이 있었지만, 조선 태종 이전에는 왕비가 동시에 여러 명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궁]]이 아니다.]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나제동맹|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비정하게 이용된 것이다. 결국 소비 부여씨가 신라로 시집간지 약 1년이 지난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버지 성왕이 남편 진흥왕과의 전투 중 사망했고, 한때는 동맹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소비 부여씨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 여담 == * 한국사에서 소비(小妃)라는 칭호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다.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에 기록된 [[위덕왕]]의 누이 공주와 동일인인지는 불분명하다. * [[견훤]]이 선조라고 주장했던 [[진흥왕]]의 아내 백숭부인(白𪀚夫人)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우선 [[백제]] 계승을 내세운 견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가장 좋은 인물이고, 더불어 신라의 정통성도 동시에 이어받은 셈이므로 [[삼한일통]]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한편 한자를 살펴봐도 백(白)은 [[오방색]]에서 서쪽을 뜻하며 숭(𪀚)의 부수인 융(戎)은 [[서융]]으로서 서쪽 오랑캐를 뜻하므로, [[관산성 전투]]로 백제와 사이가 틀어진 신라 측에서 백제를 그렇게 생각했던 입장을 담은 호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시대의 경쟁자 왕건도 조상을 당나라 황제라고 남겼고 그것이 고려시대 당대에도 의심과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왕건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왕건 정권이 후당에 찔러준 정보를 바탕으로 후당의 2대 황제인 [[이사원]]이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했을 때, 왕건을 장회무족(長淮茂族)이라 하여 회이(淮夷)의 번성한 일족 출신이라고 추켜세워주었는데 이 회이라는 말은 지역적으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준독립세력인 평로치청번진을 세웠을 정도로 고구려 유민이 대단히 많았던 [[회하]] 유역에서 [[산둥성]] 동남부에 걸쳤던 지역을 말한다(주로 현 [[장쑤성]] [[양저우시]] 일대). 또한 무려 최소한 [[한사군]]의 [[낙랑군]]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시대를 거치며 융성했던 고구려 계열 성씨가 다름 아닌 '왕씨'였던 것도 강렬한 시사점이 있다.] 후삼국 당대에는 조상을 유명인에 이어붙이는 윤색이 활발했기에 견훤도 그랬을 가능성은 물론 있으나, 견훤의 이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다름아닌 진흥왕의 선대왕 [[법흥왕]] 때 견훤과 아자개의 고향 상주와 문경 일대가 신라 왕실의 직접적인 투자를 받아 크게 발전했고 그 일대 지방세력가들의 부장품 또한 그 양과 질이 대폭 개선되는 게 고고학적 연구 결과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법흥왕 이후부터 이 일대 호족들이 신라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을 개연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견훤과 아자개의 부계 선조가 진흥왕과 이 소비 부여씨 사이에서 나온 자손과 혼인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라는 모계 혈통이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진골이라고 해도 6두품 이하 자손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절대로 진골이 될 수 없었고 당연히 왕위계승권도 없었다. 물론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있었다면 그 왕자녀는 진골 대우는 받았겠지만 다른 신라 진골들에겐 꽤 꺼려지는 결혼 상대였을테고[* 심지어는 신라와 대단히 관계가 돈독한 [[가야]] [[금관국]] 왕족 출신의 신 김씨들도 문무왕의 시대가 되기 전까진 적어도 진골 상대 결혼 후보자로는 꺼려질 정도였다.], 그러면 상대는 6두품 이하 왕경인이나 왕실 직할령(문경, 상주, 영주 등이 포함된 죽령, 추풍령 일대)지방 유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견훤의 족보들 중 백숭 부인이 등장하지 않고 아예 부여융을 선조로 하여 세대수가 납득이 가게 작성된 족보가 있는데, 해당 족보는 그 시기의 정확성 탓에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된다. 어느 누가 봐도 뭔가 어설픈 부분이 있고 세대수도 분명 좀 엉터리인 백숭부인판 족보가 적어도 진실성이나 신뢰도는 높은 형편이다.] [[분류:몰년 미상]][[분류:백제의 왕족]][[분류:신라의 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