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사)] [목차] == 개요 == 蕭撻凜, ?~1005 [[요나라]]의 명장. [[야율사진]]의 밑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을 생포하는 공을 세우나, 1005년 북송군과의 전쟁에서 정찰 도중 쇠뇌에 맞아 죽는다. == 생애 == 생년 미상으로, 평생 군사 활동을 위주로 했다. 986년 요나라와 송나라의 연운 전투에 참가하여 추밀사 [[야율사진]]의 밑에서 산서(山西)에서 북송의 명장 [[양업]]을 삭주에서 사로잡았다. 993년에는 [[소손녕]]과 함께 [[제1차 여요전쟁]]에 참전했고, 고려로 하여금 신하 국가로서 공물을 바치도록 했다.[* 그러나 [[서희]]의 말발에 밀린 소손녕은 강동6주를 고려에 넘겨준다.] 994년 황태비(皇太妃) 소호련(蕭胡輦)은 서북 우구 등의 부병과 영흥궁 분군을 이끌고 서북 노하 지역에 주둔하여 서북로 초토사를 맡았는데, 그 와중 소달름은 세심하게 변방을 진정시키고 변방을 위한 대책을 모색했다. 야율소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목축을 분산시켜 그 땅을 편리하게 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치료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제거하라고 건의했고, 소달름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든 부서를 위엄있게 다스리고 덕을 베풀었다. 997년 적열부는 요에 복종했으나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소달름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저항하는 자를 토벌했다. 이에 성종은 직접 시를 지어 포상을 하였으며, 동시에 야율소에게 그 공적을 부하도록 하였다. 소달름은 1001년 남경 통군사로 임명되어 1004년에 쇠뇌에 맞아 1005년 죽을 때까지 4년 동안 북송 전선에서 활약했다. 송의 위로와 순안의 여러 군사를 차례로 공격하고, 왕계충을 왕두강촌에서 사로잡고, 보, 정, 영 등의 주를 연공하여 전주를 직접 공격하여 송군을 위협하였으나 1005년 어느 날 지형을 정찰하던 와중 북송군의 쇠뇌를 맞아 영채로 옮겨져 그날 밤 사망하였다.[* 이때 북송 진종은 남천을 생각했으나 재상 [[구준]]이 진종으로 하여금 친정을 하게 하였다.] 다음날 그의 관은 소태후의 막사로 옮겨졌고, 소태후는 통곡하며 5일 동안 조회를 중단했다. 그의 죽음은 [[전연의 맹|전연지맹]]이 체결되는 계기가 된다. [[분류:요나라의 인물]][[분류:100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