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카이사르)] ||<-2> '''{{{#fecd21 로마 제국 카이사르[br]{{{+1 Seius Sallustius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 || || '''{{{#fecd21 제호}}}'''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카이사르[br](Seius Sallustius Caesar) || || '''{{{#fecd21 생몰 년도}}}''' ||미상 - 227년 || || '''{{{#fecd21 카이사르 재위 기간}}}''' ||225년 ~ 227년|| || '''{{{#fecd21 자녀}}}'''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딸) || [목차] [clearfix] == 개요 == 황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의 아버지이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장인.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는 설이 제기되나 불분명하다. 사위의 모후인 [[율리아 마마이아]]에 의해 처형되었다. == 행적 == 그의 기원은 고대 문헌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원로원]] 의원이라는 정보만 전해졌다. 그의 이름 조차도 동시대의 어떤 출처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단지 '알렉산데르 황제의 장인'이라고만 기술되었다. 후대 역사서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를 마크리아누스 또는 마크리누스라고 칭했다.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는 고고학자들이 그의 딸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의 주화를 발굴하면서 밝혀낸 전체 이름인 '그나이아 세이아 헤렌니아 살루스티아 바르비아 오르비아나'에서 유추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알렉산데르의 장인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치세 때 [[마우레타니아]] 총독이었던 퀸투스 살루스티우스 마크리아누스 또는 그의 아들과 동일하거나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밝힌 '마크리아누스'라는 이름은 마냥 꾸며낸 게 아닌 셈이다. 한편, 조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소꿉친구이며 [[명상록]] 보급에 기여한 원로원 의원 세이우스라는 설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후기 고대 작가 폴레미우스 실비우스는 반란자 살루스티우스를 언급했다. 그는 이 살루스티우스가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통치기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살루스티우스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장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상대로 반란을 도모한 적도 없고 황위 계승자로 자처한 적도 없었기에 실비우스가 언급한 반란자와 같은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는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225년 딸과 알렉산데르의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사회적 지위가 급상승했다. 이 결혼은 황제의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가 주선했는데, 아마도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이의 딸을 황후로 맞이한다면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듯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한 [[푸블리우스 헤레니우스 덱시포스]]의 역사서에 따르면, 알렉산데르는 장인에게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칭호를 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 등 동시대 문헌에는 그런 이야기가 전혀 나와있지 않고, 고고학적 물증도 없기에 불분명하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처음에는 자기가 가려뽑은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자기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는데, 며느리가 황후가 되면서 아우구스타 칭호를 공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오르비아나는 어린 나이에도 당돌하고 할 말을 다하는 성격이어서, 남편을 조종하는 시어머니에 맞섰다.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이 2년째 접어드는 시점부터 마마이아와 살루스티우스 부녀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마마이아는 성인이 된 아들의 사생활 전반을 대놓고 통제했고, 며느리를 온갖 트집을 잡으며 핍박했다고 한다. 227년, 살루스티우스는 [[프라이토리아니]] 막사를 찾아가서 마마이아의 핍박으로부터 딸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마마이아는 이를 빌미삼아 그가 근위대를 이용해 알렉산데르와 자신을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몰아세웠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장인이 억울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머니의 말에 순종하여 장인을 처형했다. 그 후 오르비아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박탈당하고 강제로 이혼당한 뒤 아프리카 속주로 추방되었다. 이상은 헤로디아누스가 전하는 내용이나,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인용한 덱시포스의 역사서는 다르게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마크리아누스'는 나중에 황제를 암살하여 황위를 찬탈하려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분류:카이사르]][[분류:22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