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가톨릭]] [[파일:ctu000018.jpg]] [목차] [clearfix] == 개요 ==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성체 현시와 강복 예식|성체 현시와 강복]], 성체 행렬 등 성체를 보여주는데 쓰이는 제구이다. == 유래 == 성광은 초대 교회 때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세]] 말에 이르러 신자들 사이에서 성체 공경 신심이 커짐에 따라 시작된 성체 현시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가 1264년에 ‘그리스도의 성체 대축일’(지금의 [[연중 시기#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제정한 후 ‘성체현존’에 대한 신심이 고무되었는데, 이것이 성광이 등장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성광은 [[성당]] 안에서 성체를 옮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예로는 [[사제]]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행렬 때 성체가 들어있는 궤를 운반한 실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1287년에는 성합(聖盒, ciborium)과 같은 것을 이용해서 성체를 현시하여 공경 예절을 하였으며, 14세기부터는 [[스페인]]을 시작으로 ‘그리스도의 성체 대축일’에 성체 행렬과 현시를 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미사]] 외의 성체 공경 예식은 이렇게 중세 후기에 널리 확산되었으며, 성광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체 현시를 위해 만들어진 성광을 독일에서는 ‘성체현시대’(monstrantia)라고 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성체감실’(tabernaculum), 스페인에서는 ‘성체갑’(custodia)이라고 불렀다. 14세기 후반부터 성광의 사용이 교회 내에서 점차 확산되면서 15-16세기에는 그 수효가 크게 늘어났고, 그 모양도 성합의 형태에서 차츰 변화되어 갔다. 특히 17세기에는 모든 교회에서 성광을 사용하도록 요청하는 교회 회의가 여러 번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 때 반드시 일정한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라는 제한 규정이 선포되지는 않았으나, 성체를 공경하는 관점에서 성체가 직접 닿는 부분은 반드시 순[[금]]으로 하고 나머지 부분은 [[은]]이나 [[구리]]에 금박을 입히도록 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주석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목재 사용은 금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