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왕자]][[분류:고려의 후작]][[분류:1307년 사망]] [목차] == 개요 == 王琠 (? ~ 1307) [[고려]]의 왕족으로 이름은 왕전, [[작위]]는 서흥후(瑞興侯)이다. [[충선왕]]의 반대파에게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상대로 점찍어졌으나 [[충선왕]]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처형되었다. == 생애 == [[양양공]]의 아들인 시안공 왕인의 손자이고, 서원후 왕영의 아들이지만 최유엄(崔有渰)은 서흥후를 후사로 세우려는 충렬왕에게, 서흥후가 왕위를 이으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서원후와 시양후 두 사람을 종묘에 모셔야 하기 때문에(若瑞興侯立, 追王其祖禰西原·始陽二侯入祔) 충렬왕의 신위는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전 버전에서 서흥후가 시양후의 양자로 출가했기 때문에 두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서술한 바 있으나 이는 서원후의 아버지인 시'''안'''공을 잘못 서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렬왕]] 27년(1301년) [[원나라]]에 보내져 툴루게에 임명된다. 충렬왕 29년(1303년) 왕이 직접 원에 오는데, 충렬왕의 아들이자 선왕인 [[충선왕]]의 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에게 재가시킬 것을 논의한다. 충렬왕은 충선왕을 [[승려]]로 만들어버리고 서흥후를 대신 아들로 삼으며, 계국공주는 서흥후에게 재가하게 함으로 충선왕의 복위를 막을 계획을 꾸몄다. 서흥후는 충렬왕의 뜻에 따라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貌美)에 더해 고운 옷을 입고 다니며 계국공주의 눈에 띄도록 한다. [[고려사]]에서는 "계국대장공주가 평소 행실이 문란했기에 금세 서흥후를 마음에 품게 됐다"고 전한다. [[고려]]에서는 왕유소, 송방영 등이 충렬왕을 따라 서흥후를 지지했고, 원에서 황후와 좌승상 아쿠타이 등을 설득해 이 계획에 참여하게끔 했다. 그러나 우승상 타르칸이 이렇게 말하며 반대한다. >이지르부카 왕([[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 칸]])의 외손이고, 부다공주([[계국대장공주]]) 또한 종실([[보르지긴]])의 딸이다. 적자를 폐하고 개가시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益知禮普化王, 世祖之甥, 寶塔公主亦宗室女也. 廢嫡改嫁, 於理安乎?) 타르칸은 이어서 서흥후가 왕의 자식은 맞는지 물으며 왕유소를 몰아간다. 홍자번은 이를 놓치지 않고 "왕유소 등이 국왕 부자를 이간질한다"고 원 중서성에 말하니, 서흥후를 옹립하려던 왕유소 등 4인이 옥에 갇힌다. 충렬왕은 경수사에 유폐되고 충선왕이 권력을 잡게 된 이듬해 충렬왕 33년(1307년), 왕유소 등은 문명문[* 文明門, [[대도]]의 남문] 밖에서 참수되고 가산은 적몰됐으며 부자, 형제는 모두 노비가 됐다. 충선왕은 서흥후를 용서하려 했지만, 승상이 불가하다고 해서 함께 참수된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왕전(동음이의어), version=2, paragraph=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