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서종락}}}'''[br]'''徐鍾洛'''}}}}}} || || '''자 / 호''' ||주일(周一) / 성호(城湖) || || '''본관''' ||[[달성 서씨]][* 학유공파(學諭公派) 23세 락(洛) 항렬.] || ||<|2> '''출생''' ||[[1873년]] [[3월 16일]][* 달성서씨학유공파세보 권1 23쪽에는 1874년 3월 11일생으로 등재돼 있다.] || ||[[경상도]] [[청송군|청송도호부]] 현북면 신성리[br](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청송)|안덕면]] 신성리)[* [[http://aks.ai/GC06800805|#]]] || || '''사망''' ||[[1940년]] [[7월 20일]] (향년 67세) || || '''묘소'''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청송)|안덕면]] 명당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의병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3년 3월 16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북면 신성리(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에서 아버지 서찬성(徐鑽成, 1846 ~ 1922. 8. 22)과 어머니 [[함안 조씨]](? ~ ?. 12. 9)[* 조능우(趙陵祐)의 딸이다.]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3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321|정용기]](鄭鏞基)가 아버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548|정환직]](鄭煥直)의 지시로 의병진을 창설하려고 준비하자, 이에 가담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354|남석구]](南錫球)·[[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476|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함께 청송군 지구의 의병 모집 책임을 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창설되자 후봉장(後鋒將)에 임명되었다. 곧 의병진의 총 병력이 2천 명을 넘자 북진을 계획해 [[영덕군]]의 [[신돌석]] 의진과 협력하에 청하군 현내면 읍내를 공격했고, 이어 [[영천군]] [[자양면]]과 [[청송군]] 현북면 신성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후 산남의진은 잠시 휴식기를 가졌고, 1907년 4월 다시 거병해 청하군 죽남면 매현리에 장영도소(將營都所)를 정했으나 기밀이 누설돼 정용기와 [[이한구(1870년 9월)|이한구]]·[[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했다. 그 뒤 정환직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정환직 또한 같은 해 12월 11일 영천군 남쪽 교외에서 순국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08년 [[신돌석]]의 영덕의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과거 동지였던 남석구와 함께 의병진을 재구성해 의병진의 동쪽을 맡았다. 서종락의 의병진에는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0555|최세윤]](崔世允)·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했으며, 각각 50명에서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군]], [[청송군]] 안덕, [[안동군]], 연일군 등지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1908년 말에 [[경주군]], 영천군, 의흥군, 청송군 등지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의 합동 토벌대와 격전 끝에 청송군 현북면 고와동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의병진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후 은거하다가 1940년 7월 20일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달성 서씨]][[분류:청송군 출신 인물]][[분류:1873년 출생]][[분류:194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