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3> '''7대 [[천주교 대구대교구|{{{#000000 천주교 대구대교구}}}]]장'''[br] '''{{{+1 서정길 [[사도 요한|{{{#000000 사도 요한}}}]]}}}'''[br] '''徐正吉''' | '''John Seo Jung-gil''' || ||<-3> [[파일:서정길.jpg|width=100%]] || ||<|2> '''출생''' ||<-2>[[1911년]] || ||<-2>[[경상북도]] [[울산광역시|울산군]] 두서면 미호리[*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 || ||<|2> '''사망''' ||<-2>[[1987년]] [[4월 7일]] (향년 77세) || ||<-2> || || '''국적''' ||<-2>[[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2> '''주교 임명일''' ||<-2>[[1955년]] 대목구장 임명 || ||<-2>[[1962년]] [[7월 5일]] 대주교 승품 || || '''재임기간'''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교구장]] ||[[1955년]] [[9월 15일]] ~ [[1986년]] [[7월 5일]]|| ||<-3> [[파일:external/www.cbck.or.kr/20_1.jpg|width=100%]] || ||<-3> '''[[주의 기도|{{{#000000 ADVENIAT REGNUM TUUM}}}]]''' [br] ('''주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기도]] 중 일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한국 가톨릭]]의 제'''7'''대 [[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이다. 교구장으로 [[1955년]] [[9월 15일]]부터 [[1986년]] [[7월 5일|'''7'''월 5일]]까지 재임하였다. 개명 전 이름은 서봉길(徐鳳吉)이었다. == 생애 ==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군]] 두서면 미호리[* 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에서 출생. 1932년 [[대구가톨릭대학교/캠퍼스#s-1.3|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 철학과를 거쳐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동기로 [[주교]]품을 받은 사람은 서정길 대주교를 포함해서 무려 3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마산교구장을 지낸 [[장병화]] 요셉, 다른 한 사람은 부산교구장을 지낸 [[최재선]] 요한이었다. 사제 수품 후 [[부산]] 청학동본당 주임신부, 1943년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1945년 대구교구 경리부장, 1948년 대구 [[계산성당|계산동본당]] 주임신부, 1954년 [[천주교 부산교구|경남감목대리]] 겸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고, 1955년 제'''7'''대 대구교구장(겸 초마티타누스 명의주교)으로 임명되어, 동년 9월 15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주교 서품식의 주례주교는 대구교구 제 2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제르맹 무세 (한국명 문제만) 주교였다. 주교 수품 얼마 후에 서정길로 개명하였다. 1962년 3월 [[한국 가톨릭]]의 교계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자, 동년 '''7'''월 5일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어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2·3·4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72년 [[이문희]] 바울로 보좌주교를 총대리로 임명, [[대구대교구]]의 행정을 맡게 하였다. 1955년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986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많은 남녀 [[수도회]]를 [[대구대교구]]로 초치, 전교와 교육을 전담시켰고, 또 [[천주교 부산교구|부산교구]], [[안동교구]] 등을 분할, 독립시키는 등 대구대교구와 [[한국 천주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형 [[이단/기독교|이단]]을 잡아낸 전적도 있는데, 1957년에 있었던 "[[상주시]] 황 데레사 사적계시 사건"[* 쉽게 말해서 경상도판 [[마리아의 구원방주]]라고 보면 된다.]에 대해 직접 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실시하여, 황 데레사와 관련된 신심 일체를 금지시키는 교령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함께 발표했다.[* 이때 당시, 대구대교구 신부였던 [[김남수(주교)|김남수]] 안젤로 주교도 이 사건으로 교구청에 불려가서 서 대주교에게 엄청 깨졌는데, 이 때 정신을 못 차렸는지, [[수원교구]]장 시절에 이 이단들에게 다시 간접적으로 협력해버렸다.] 이후 이들 세력은 [[수원교구]]의 [[미리내 성지]]로 이동하여 여러 수도회를 창립하였고, 결국 2008년에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한 번 더 정죄되었다가, 미리내 수도단체연합 vs. 수원교구로 사건의 스케일이 커져, [[교황청]]이 직접 개입하여 중재에 나선 2013년에야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 [[https://cbck.or.kr/Notice/13012063?page=82&gb=K1200|2013년 최종 합의문.]] 건강이 썩 좋지 못하여서 재임 내내 병석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주교]]가 되고 얼마 후 [[결핵]] 진단을 받고 장기간 요양을 하였다. 결국 [[독일]]에서 효험이 좋은 약을 처방받아 결핵을 완치시켰는데, 당시 서정길 대주교를 간호해 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198'''7'''년 4월 '''7'''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2018년에 서 대주교의 선종 31주기를 맞아, [[칠곡군]] 동명 성가양로원 내부에 서정길 대주교 기념전시관이 조성되었다. --숫자 [[세븐 갤러리|'''7''']]과 은근 인연이 깊다-- [[분류: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분류:울주군 출신 인물]] [[분류:달성 서씨]] [[분류:1911년 출생]] [[분류:198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