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3> {{{#fff {{{+1 '''서울역 압사 사고'''}}}[br]서울驛 壓死 事故[br]Seoul Station Crushing Death Accident}}} || ||<-3>{{{#!wiki style="float: center; margin: -5px -10px" [[파일:서울역 압사사고.jpg|width=100%]]}}}|| ||<-2> '''{{{#fff 발생일}}}''' ||[[1960년]] [[1월 26일]] 사고일로부터 '''[dday(1960-01-26)]일''' || ||<-2> '''{{{#fff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용산구]] 봉래동2가 [[서울역]][br](現 문화역서울 284) || ||<-2> '''{{{#fff 유형}}}''' ||[[다중밀집사고]] || ||<-2> '''{{{#fff 원인}}}''' ||무질서 || ||<|3> '''{{{#fff 인명피해}}}''' || '''{{{#fff 사망}}}''' ||'''31명''' || || '''{{{#fff 부상}}}''' ||'''40~41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역 압사 사고'''(서울驛 壓死 事故, Seoul Station Crushing Death Accident)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인 [[1960년]] [[1월 26일]] 밤 11시경(정확히는 개찰이 시작된 10시 50분경부터) [[서울역]] 승강장에서 31명이 [[압사]]하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한 사고다. == 상세 == 사고가 벌어진 1월 26일은 [[설날]]을 이틀 앞둔 날이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사고 당시 [[서울역]]에서 [[익산역|이리]]·[[정읍역|정읍]]·[[광주송정역|송정리]]·[[영산포역|나주]]·[[목포역|목포]]로 향하는 [[호남선]] 하행선 [[승강장]]에는 하루 평균 1300명대의 인파가 모였는데 사고 당일에는 이에 3배에 달하는 3,90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렇게 승강장 내부가 인파로 미어터진 상황에서 하필이면 역 직원이 "열차 출발 5분 전"이라고 외쳤고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승강장 계단 쪽으로 내달리는 과정에서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미끄러지면서 많은 사람이 밀리면서 압사했다. 최종적으로 역내 계단에서만 31명이 사망하고 40~41명이 부상당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12110530005188|「60년 1월 26일 서울역 설 귀성객 압사 사고… 계단에서 넘어지며 31명 사망」]], 한국일보, 2022-01-26] === 사고 원인 === ==== [[인재#人災|인재]] ==== 당시 서울역에 평균 인파의 3배가 넘는 약 3900명의 사람들이 목포 방향 개찰구 쪽으로 몰려들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서울역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거기에 정원 80명인 열차 한 량에 200명의 표를 팔았다. 물론 이를 교통부(現 [[국토교통부]][* 철도 운영 부분은 [[대한민국 철도청|철도청]]으로 분리되어 현재 [[한국철도공사]]로 존치 중])에서도 예측하고 8량 [[기차]]를 18량으로 늘렸음에도 사고를 막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표 3000장이 발매되었으며 거기에 [[무임승차]]까지 더해지자 사고 피해는 더 커졌다. 심지어 [[개찰]] 같은 경우에는 발차 35분 전에 시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고 당일에는 5분을 남기고 시작했다고 하며 승강장 내 [[조명]]과 [[천장]], 난방 시설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승차권은 좌석번호가 기재된 지정석이 아니라 먼저 앉으면 자리 주인이 되는 [[자유석]]이어서 먼저 착석하려는 승객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서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 자연적 요인 ==== 자연적인 요인도 사고가 커지는데 한몫을 했다. 사고 즈음에는 서울에 눈이 내렸고 사고 당일 서울의 최저 기온은 -12.2℃까지 떨어졌으며[* [[https://www.weather.go.kr/w/obs-climate/land/past-obs/obs-by-day.do?stn=108&yy=1960&mm=1&obs=1|당시 기상기록]], 기상청] 심지어 이틀 전에는 최저기온이 -17℃를 기록하는 강력한 한파가 찾아왔다. 잦게 내린 눈과 추운 날씨는 계단 곳곳을 빙판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희생자들이 더 넘어진 이유가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당시 서울역에 난방 시설과 천장이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라서 결국은 인재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 여담 == * 당시 희생자의 대부분은 [[부녀자]]였으며 2023년 현재까지도 [[서울역]] 개업 이후 유일한 승객 [[압사]]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 사고 당일 [[서울역]]에는 [[기자]]가 단 1명만 있었는데 위에 사진은 그 기자인 [[한국일보]] 정범태 기자(1928~2019)가 찍은 것이다. 그는 본인이 특종을 따내기 위해서 사진을 찍은 후 역무원들에게 다른 기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급하게 현장을 정리하도록 시켰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8178&cid=59013&categoryId=59013|네이버 지식백과]]] 본인도 칭찬에 우쭐해 사망자들의 명복을 빌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혼자 따낸 특종 뒤에는 이런 어두운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 3달도 안 돼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의 고려대생 피습 현장을 찍는 등 온갖 리얼 사진으로 한국사에 사진 특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런 뒷모습도 있었다. * [[1974년]] [[9월 28일]] [[추석]] 연휴 [[용산역]]에서도 압사 사고가 발생해 4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날은 토요일이었고 1974년 추석은 9월 30일 월요일이었다. * 본 사건은 [[1959년]]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두 번째 최악의 압사사고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부터 62년이 지난 2022년에 그때보다 5배나 많은 인명피해가 난 [[이태원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 유사 사고 == *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 [[애스트로월드 뮤직 페스티벌 압사 사고]] * [[이태원 압사 사고]] [각주] == 둘러보기 == [include(틀:대한민국의 대형 참사)] [[분류:용산구의 사건사고]][[분류:서울역]][[분류:1960년/사건사고]][[분류: 압사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