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독관계]][[분류:독일 제국]][[분류:외교공관]][[분류:종로구]][[분류:중구(서울)]][[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 ---- [include(틀: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파일:독일공사관.png|width=100%]]|| || 독일 공사관[[http://www.seoulstory.kr/front/kor/story/view.do?searchCondition=0&searchKeyword=%EB%8F%85%EC%9D%BC%EC%98%81%EC%82%AC%EA%B4%80&sStatus=9&sDivi=0&sTag=&pageIndex=1&idx=3690|#]]. 회동에 있던 시기에 찍은 것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중구(서울)|중구]]에 있었던 [[독일 제국]]의 옛 [[공사관]]이다. ||<-2><#000> || ||<#fff>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100%]] ||<#fff> [[파일:독일 제국 국장(1889).png|width=100%]] || || 독일제국 국기 || 독일제국 국장 || == 역사 == 1883년([[고종(대한제국)|고종]] 20년)에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한독관계#s-3.1|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독일 제국|독일]] 정부는 [[한성부|한성]]에 독일 [[영사관]]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지금의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인 낙동에 영사관을 두었다. 그러나 건물이 좁고 낡아서 근처의 빈집을 사용하게 해달라고 [[조선]] 측에 여러 번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당했다.[* 이미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정부]]에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
[[파일:박동 독일영사관.png|width=100%]]|| || 박동 시절 독일 영사관. 원래 민겸호와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집이었다. || 그러다 1886년([[고종(대한제국)|고종]] 23년) 11월에 지금의 [[수송동]]인 박동으로 옮겼다. 박동 영사관 건물은 원래 [[민겸호]]가 살았던 집이다. 민겸호는 부정부패를 일삼아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 집에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아 빈 집이었던 곳을 조선 정부에서 [[청나라]]의 파견으로 온 외교 고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에게 하사했다. 그러다 묄렌도르프가 1885년(고종 22년)에 청나라로 돌아가 다시 비어있던 상태에서 독일영사관이 입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독일 회사 세창양행[* 묄렌도르프의 후원으로 [[제물포]]에 진출했고, 이후 각종 근대 문물([[군함]]도!)을 수입하는 창구 역할을 한 회사이다.]에서 독일영사관 땅이 자신들 소유라고 주장했던 것.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묄렌도르프]]가 [[조선]]을 떠나면서 세창양행에 땅을 팔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1890년(고종 27년)에서 1891년(고종 28년) 사이에 서소문동에 있던 왕립 학교 [[육영공원]] 자리로 영사관을 다시 옮겼다.[* 육영공원은 전동으로 이전했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일대이다. ||
[[파일:서소문동 독일공사관.png|width=100%]]|| || 서소문동 시절 독일 영사관[[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content_seq=9|#]] || 그런데 독일영사관은 '''또(...)''' 자리를 옮겨야했다. 1897년([[건양]] 2년) 이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덕수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면서 그 일대에 관청을 지으려 했는데 독일영사관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00년([[광무]] 3년) 3월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독일영사관 땅을 5만 5천원에 매입했고, 대신 [[회현동(서울)|회동]]에 있는 국가 소유의 땅을 함께 주었다. 이에 독일영사관은 회동으로 이전했다. 다만 새로 [[건물]]을 짓느라 바로 옮기진 못했고 1902년([[광무]] 6년)에 [[공사]]를 끝낸 후에 옮겼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
[[파일:회동 독일공사관.png|width=100%]]|| || 회동 시절 독일 공사관[[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content_seq=4|#]][[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content_seq=5|#]] || || [[파일:회동 독일공사관2.png|width=100%]]|| || 회동 독일공사관에서 촬영한 북문과 뒷뜰의 모습. 뒤에 [[숭례문]]이 보인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12201030730065002|#]] || 1년 뒤인 1903년([[광무]] 7년) 5월에 [[공사관]]으로 승격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일본 제국|일제]]가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여 한국과 [[독일 제국|독일]]의 [[국교]]는 끊겼다. 독일공사관은 다시 [[영사관]]이 되었고 1906년(광무 10년)에 '''다시(...)''' [[돈의문]] 밖 평동 26번지로 이전했다. --[[역마살]]이 끼었나--[[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
[[파일:평동 독일공사관.png|width=100%]]|| || 평동 시절 독일 영사관[[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OrgFilePopup.do?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content_seq=11|#]] ||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 [[영사관]]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독일 제국|독일]]이 [[일본 제국|일본]]의 [[적|적국]]이 되면서 영사관은 문을 닫았다. 서울[* 당시 이름은 [[경성부|경성]].]의 독일영사관은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인 1928년에 다시 생겼으나 예전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광화문통[* 지금의 [[세종대로]].], 서소문정[* 지금의 [[서소문로]].]을 전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폐쇄했다. 이후 조선 관련 업무는 [[중국]] [[다롄시|다롄]]에 있는 영사관에서 담당했다. [[한독관계|한국 - 독일 외교관계]]는 [[8.15 광복]] 이후 10년 뒤인 1955년에야 다시 재개되었다. 회동에 있던 [[공사관]] 건물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다시 사들여 [[탁지부]] 관리들의 [[구락부]]로 활용했고, 이후 경성구락부와 남대문세무서에서 사용하다가 1970년 경에 민간 소유로 넘어간 후 헐렸다. 평동에 있던 [[영사관]] 건물은 1920년 6월에 조선식산은행에서 6만원을 주고 사들였다.[[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710&index_id=cp07100177&content_id=cp071001770001&search_left_menu=3|#]] == 건물 == == 여담 == ----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version=64, paragraph=2.4, title2=서울 구 벨기에영사관, version2=14, paragraph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