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서세충.jpg|width=300px]] || || 성명 ||서세충(徐世忠) || || 이명 ||서병두( 徐丙斗) || || 호 ||춘강(春江) || || 생몰 ||[[1888년]] [[7월 5일]] ~ [[1957년]] [[11월 2일]] || || [[출생지]] ||[[서울특별시]]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서세충은 1888년 7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성학교(漢城學校)를 졸업하고, 1909년 [[신민회]]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윤세복]](尹世復), [[김동삼]](金東三), [[고순흠]],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박중화(朴重華), [[신백우]], 이원식(李元植), [[안희제]](安熙濟)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했다. 1920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인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했다가 1921년에 발각되어 체포되어 몇달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신간회가 전국대회를 열지 못하자, 몇 개 지회가 한 사람을 합동 선출해 그를 복대표(複代表)로 하여 약식 전체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전체복대표대회가 1929년에 개최되었을 때, 그는 서울지회의 복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는 만주로 이주했으며, 1936년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옥사하자 그의 유해를 화장해 향리로 보내줬다. 이후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이 창설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지내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관내로 이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8.15 광복]] 후 조국으로 귀환했지만,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반역 혐의로 재판에 소환되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르는 것은 면할 수 있었고, 1957년 11월 2일에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서세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달성 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888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