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연문간왕(燕文簡王)[br]{{{+1 向敏中 | 상민중}}}''' || || '''작위''' ||연왕(燕王) || || '''시호''' ||문간(文簡) || || '''성씨''' ||상(向)[* 성으로 쓰일 때는 상으로 읽는다.] || || '''이름''' ||민중(敏中) || || '''자''' ||상지(常之) || || '''부친''' ||상우(向瑀) || || '''생몰''' ||949년 ~ 1020년 || || '''출생''' ||개봉부(開封府)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시대의 명신으로 자는 상지(常之). 개봉부(開封府) 출신이다. == 생애 == === 초기 생애 === 949년 상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우는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에서 부리현령(符離縣令)을 역임했으며, 성품이 엄격하고 강직했다. 상민중은 상우의 유일한 자식이었기에 상우가 직접 교육하고 독촉하였으며, 얼굴에 가식을 드러내지 않았다. 상우는 자신의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상민중을 칭찬했다. >우리 집안을 크게 할 사람은 이 아이일 것이오. 상민중이 아버지와 함께 개봉부에서 부임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서생이 문 앞을 지나가다가 상민중을 보고 이웃집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풍채와 골격이 특출하니, 존귀하고 오래 살 것입니다. 이웃집의 어머니가 상민중의 집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서생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상민중은 장성하면서 잇달아 부모님이 상을 당했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큰 뜻을 품었고 가난을 따지지 않았다. === 태종 재위기 === 상민중은 [[태종(송)|태종]] 재위기인 980년 진사에 급제하여 장작감승(將作監丞)·길주통판(吉州通判)으로 임관했고 우찬선대부(右讚善大夫)로 전임되었다. 전운사(轉運使) 장제현이 상민중의 재능을 천거하여 조정으로 복귀한 뒤 저작랑(著作郞)으로 임명되었다. 태종이 상민중을 편전에서 소견할 때 상민중은 유창하게 대답하여 태종이 상민중을 아끼며 호부추관(戶部推官)으로 삼하고 회남전운부사(淮南轉運副使)로 전출시켰다. 상민중이 부임하기 이전에 지방의 재무를 맡은 관리들은 모두 자신의 권력과 총애를 믿고 스스로 높은 사람인 체를 해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는데, 상민중은 속관들을 예우하며 부지런히 근면하였고 인재 선발에 힘썼다. 한편 어떤 이가 상민중의 군사적 재능을 추천하자, 태종은 상민중을 소견하여 장차 제사부사(諸司副使)로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민중은 간곡히 사양하며 자신이 쓴 글을 태종에게 바쳐 직사관(直史館)이 더해지고 회남으로 돌아가 직무를 맡았다. 그리고 태종이 적전을 간 뒤 상민중은 품계를 뛰어넘어 좌사간(左司諫)이 되었으며, 입조하여 호부판관(戶部判官),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판대리시사(判大理寺事)를 임시로 맡았다. 991년, 감찰어사(監察御史) 조길(祖吉)이 이전에 지진주(知晋州)를 맡았을 때 뇌물을 받은 죄로 처형되었다. 뒤에 조길의 뇌물을 몰수하여 법을 집행한 관리들에게 나눠줄 때 상민중은 종리의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진주를 받지 않은 고사를 인용하며 홀로 받지 않았다. 뒤에 여승 도안(道安)의 사건에 개봉부판관(開封府判官) [[장거화]]가 연루되었는데, 장거화는 상민중의 장인이었기에 상민중은 자신이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판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관들이 모두 폄관될 때 상민중은 오히려 친척이 연루되었기에 파직되어 지광주(知廣州)로 전출되었다. 그리고 광주로 부임하기 직전 상민중은 해당 사실을 태종에게 보고했으며, 태종은 상민중의 말에 감동하여 3년이 안 되어 상민중을 다시 조정에 부르기로 약조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으로 임명되어 광주로 부임하였다. 상민중이 부임한 광주는 상선을 관리하는 사무도 맡고 있었는데, 상민중 이전의 전임자들은 모두 이를 비난했다. 상민중은 광주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약품을 구비하여 광주로 향했고 광주에 재임하면서 요구하는 바가 없이 청렴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뒤에 상민중은 광남동로전운사(廣南東路轉運使)로 발탁되고 공부낭중(工部郞中)으로 임명되었으며, 태종은 비백서에 상민중과 장영의 이름을 넣어 중서성에 교부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두 사람은 명신이니 짐이 장차 이 두 사람을 임용하겠노라. 태종의 측근 신하들 또한 상민중의 재능을 칭찬하여 상민중과 장영은 모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로 임명되었다. 지도(至道) 연간에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하였다. === 진종 재위기 === 997년, 태종이 붕어하고 태자 조항이 즉위하니 이가 제3대 황제인 [[진종(송)|진종]]이다. == 사후 == 진종은 상민중의 죽음을 슬퍼하여 3일 동안 폐조하였으며, 상민중을 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가족관계 == 상민중의 아들인 상전정(向傳正)은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고, 상전식(向傳式)은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고, 상전량(向傳亮)은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郞)을 지냈고, 상전사(向傳師)는 전중승(殿中丞)을 지냈고, 상전범(向傳範)은 남양군왕(南陽郡王) 조유길(趙惟吉)[* [[태조(송)|태조]]의 장남 연의왕 [[조덕소]]의 아들이다.]의 딸인 안복현주(安福縣主)에게 장가를 들었고 밀주(密州) 관찰사가 되었으며, 혜절(惠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상전량의 아들인 상경(向經)은 정국군유후(定國軍留後)를 지냈고 강의(康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상경의 딸이 바로 [[흠성헌숙황후]]였으며, 1101년 흠성헌숙황후가 사망한 뒤 증조부인 상민중을 연왕(燕王)으로 추증하고, 상전량을 주왕(周王)으로 추증하고, 상경을 오왕(吳王)으로 추증하였다. [[분류:송나라의 추존 왕]][[분류:949년 출생]][[분류:1020년 사망]][[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