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 황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ffd400 '''상계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은언궁 주인)]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55E80, #4682b4 20%, #4682b4 80%, #355E80); color: #FFD400" '''은언궁 추존 궁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손자[br]{{{+1 상계군 | 常溪君}}}'''}}}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장종의 손자[br]{{{+1 상계군 | 常溪君}}}'''}}} || ||<|2> '''출생''' ||[[1769년]] [[2월 27일]]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787년]] [[1월 9일]] (향년 17세)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 '''묘소''' ||실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준(濬) / 식(湜) → 담(湛)[* 1900년([[광무]] 4년)에 편찬한 《선원속보》에서는 이름이 감(㻣)으로 잘못 나와 있다. 상계군의 서제(庶弟)인 [[풍계군|풍계군 이당]]이나 [[전계대원군|전계대원군 이광]]의 이름에 모두 구슬옥 변이 있어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 중에서 구슬옥 변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1783년생의 풍계군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쓴 이는 1790년생의 [[순조]]이다. 상계군의 이름은 실록에도 물수 변을 쓰는 담(湛)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순조의 탄생 이전에 죽은 상계군이 구슬옥 변의 이름을 썼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 || '''부모''' ||부친 [[은언군]][br]모친 상산군부인 [[송(성씨)|진천 송씨]] || || '''형제자매''' ||8남 1녀 중 장남 || || '''배우자''' ||평산군부인 [[평산 신씨]] || || '''자녀''' ||2남 (양자 [[익평군|1남]]) || || '''작호''' ||완풍군(完豊君)[br]→ '''상계군(常溪君)'''[* 봉호는 친어머니의 본관 [[충청북도]] [[진천군]]의 별칭인 '상산(常山)'에서 따왔다.]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3남이자 서장자인 [[은언군]]의 장남으로 [[조선]] [[철종(조선)|철종]]의 큰아버지이다. == 생애 == 1769년(영조 45년) 1월 21일 [[한성부]]에서 [[은언군]]과 상산군부인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첫 증손자이기도 했다. 종친부의 규칙에 의하면 [[왕세자]]의 [[손자]], 서손들에게 봉작되는 군 작위 및 도정의 작위를 받아야 했으나 이담이 따로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어린 시절에는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종친]]으로 지냈으나 11살이던 1779년(정조 3년)에 '''정계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바로 [[정조(조선)|정조]] 초기의 권신 [[홍국영]]이 상계군을 자신의 누이 동생이자 정조의 후궁으로 얼마 전에 죽은 [[원빈 홍씨]]의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삼게 하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정한 것.''' 참고로 '완풍군' 봉호는 [[조선/왕사|왕실]]의 [[본관]]인 [[전주 이씨|'''완'''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 홍씨|'''풍'''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가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한다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애초에 [[원빈 홍씨|원빈]]의' 원(元)'도 '으뜸 원' 자라서, 본부인인 [[효의왕후|중전]]이 있는데 어떻게 후궁~~첩~~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느냐며 논란이 되었다. 당시 홍국영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일은 그냥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홍국영]]은 [[정조(조선)|정조]]가 [[태손|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그를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런데 '''그런 권신의 여동생이 중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 균형으로 보자면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힘이 한 쪽으로 쏠렸다는 것.''' 더구나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원빈]]은 [[후궁]] 신분인데도 생전에 마치 [[왕비|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고,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 본래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차기 [[국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 3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원빈 홍씨|원빈]]이 원호를 받는 것은 당시 예법에 어긋난다.][* 홍국영 몰락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 저 원호와 궁호를 강등시켰다.], 후궁으로서는 무리할 정도로 예우를 갖추게 했다. 게다가 원빈이 일찍 사망한 후에는 [[정조(조선)|정조]]가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을 반대하며, 굳이 정조의 [[조카]] 상계군을 정조와 원빈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여서 왕위계승권자로 삼으려 했다. 아예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 당시 정조의 나이는 28세라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자녀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 다만 아이러니한 점은 [[홍국영]]은 완풍군을 ([[원빈 홍씨|원빈]]의 [[양자(가족)|양자]]이니) 자신의 [[조카]]라며 아꼈으나, 정작 완풍군은 홍국영과 마음이 안맞아 그를 안좋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결국 무리수를 두던 [[홍국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권력]]을 잃었다. 완풍군 역시 [[파양]]당해 '상계군(常溪君)'으로 [[봉호]]가 바뀌었고, 이름도 이담으로 고쳤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한 때 [[원빈 홍씨|원빈]]의 [[양자(가족)|양자]]이자 홍국영의 양조카였던 전적 때문에 [[조정]] [[대신]]들과 다른 [[왕족]]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인지 통덕랑 신오의 딸인 군부인 신씨와 혼례를 올린 지 몇 달 되지 않은 1787년 1월 9일[* 음력 병오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불과 18살의 나이로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은언군]]의 [[독살]] 설이 있다. 상계군이 사망하기 불과 2달 전, [[정조(조선)|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이산(드라마)|이산]]》에서 [[한지민]]이,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세영(배우)|이세영]]이 연기했다.]가 [[임신]] 중 사망했는데 이 때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복중 태아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는 설이 나돌았고, 이에 [[역적]]으로 몰려 온 집안이 망할 것을 우려한 은언군이 상계군에게 독을 먹으라고 강요했다는 것이다. == 사후 == === 사후 삭탈 === 그러나 상계군과 관련된 사건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상계군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인 송낙휴가 [[상복]]을 입은 채로 [[궁궐]]로 가서 고변했다. 내용은 "상계군은 파양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김 정승(영의정 김상철)이 살면 나도 살고 김 정승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라는 말을 하고 며칠 후 급사했다."였다. 또한 송낙휴는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구선복]]이 상계군과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란 말도 했다. 구선복은 체포당해 [[고문|심문]]을 버티다가 결국 [[반역]]을 꾀해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관련자들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했고 상계군의 혼례를 주관하던 김우진 역시 상계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파직당하고 유배갔다.[* [[능성 구씨]]는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무손을 많이 배출한 무반의 명문이었는데 이 일로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가 나섰다. 이미 오래 전 일인 1779년(정조 3년)에 상계군이 [[홍국영]]의 힘으로 완풍군으로 봉군되고 왕위 후계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일을 지적해 상계군과 홍국영을 역적으로 지목하고, 그에 관한 처분을 요구하는 [[언문]] 하교를 [[승정원]]에 내린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상계군의 작위를 즉시 폐작시켜 '''"역적 담"'''으로만 부르게 했고, [[역적]]의 [[가족]]이 된 [[은언군]] 일가는 [[강화도]]로 유배갔다. 이후 [[정조(조선)|정조]]는 직접 상계군 사건에 대한 언급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으나, 상계군 일을 말하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계속 부탁했다. === 복권과 묘소 === 1849년(철종 즉위년) 음력 6월 9일, 이복 조카인 이원범이 [[철종(조선)|철종]]으로 즉위했다. 14일에는 철종의 가족들의 봉군 문제가 논의되었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계군’이라는 봉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17일에는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상계군 부부를 복권시켰으며, 23일에 가덕대부(嘉德大夫)로 복작시켰다. 1858년(철종 9년) 11월에는 철종이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승급시켰으며 그 때 과거 상계군 사건에 대한 [[기록]]을 대거 세초, 말소시켰다. [[무덤|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의 2호선 [[신촌역(도시철도)|신촌역]] 2번, 3번 출구와 [[연세대학교]] 정문 주변 근처 즈음에 있었다가 1854년([[철종(조선)|철종]] 5년) 2월 1일에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위치를 잊어 어디있는지 모른다. == 사극에서 상계군을 연기한 배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08-15 13-55-51.jpg|width=100%]]}}} || || {{{#gold ''' 〈이산〉의 상계군'''}}} || 2008년 [[MBC]] 〈[[이산(드라마)|이산]]〉에서는 배우 [[최원홍]][* 2000년 생 배우. 2005년 [[KBS]] 〈사랑은 리필이 되나요〉로 데뷔하여 〈[[계백(드라마)|계백]]〉, 〈[[인수대비|인수대비]]〉, 〈[[신의(드라마)|신의]]〉, 〈[[비밀의 문]]〉 등 [[사극]]에 많이 출연했다. [[tvN]] 〈[[피리부는 사나이(드라마)|피리부는 사나이]]에서 서준 역을, [[OCN]] 〈[[터널(OCN)|터널]]〉에서 윤동우 역을 맡았다.]이 연기했다. == 가족과 후손 == 친어머니 상산군부인 송씨(1753 ~ 1801)와 아내 군부인 신씨(1770 ~ 1801)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1801년([[순조]] 1년)에 천주교 믿는 것을 들켜 [[신유박해]] 때 둘 다 [[순교]]했고[*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속하게 되었다.], 아버지 [[은언군]]도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군부인 신씨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 한 [[궁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얻었으나 철종·고종 대의 대량 세초로 인해 생애는 물론 이름마저 전해지지 않는다. 뒤를 이을 후손이 없어 동생 [[풍계군 이당]]의 아들인 [[익평군]] 이희가 사후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었다. [[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1769년 출생]][[분류:1787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은언궁 종주]][[분류:독살된 인물]][[분류:전주 이씨 은언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