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남송의 대신[br]월충정왕(越忠定王)[br]{{{+1 史浩 | 사호}}}}}}''' || || '''[[시호|{{{#fff 시호}}}]]''' ||문혜(文惠) → 충정(忠定)^^추대^^ || || '''[[작위|{{{#fff 작호}}}]]''' ||회계군왕(會稽郡王) → 월왕(越王)^^추봉^^ || || '''{{{#fff 재상임기}}}''' ||1년 || || '''{{{#fff 최종직위}}}''' ||태사(太師)^^진위^^ || || '''{{{#fff 이름}}}''' ||사호(史浩) || || '''{{{#fff 자}}}''' ||직옹(直翁) || || '''{{{#fff 부친}}}''' ||사홍(史虹) || || '''{{{#fff 생몰}}}''' ||1106년 ~ 1194년 || || '''{{{#fff 출신}}}''' ||북송(北宋) 명주(明州) 은현(鄞縣) || || '''[[주군|{{{#fff 주군}}}]]''' ||[[고종(송)|송고종]][br][[효종(송)|송효종]][br][[광종(송)|송광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소개 == [[남송]] [[효종(송)|효종]]대의 재상이며 충신이었다. 자는 직옹(直翁), 시호는 충정(忠定), 작위는 월왕(越王)이다. == 생애 == 사호는 1106년 휘종 숭녕(崇寧) 4년때 북송 명주(明州) 은현(鄞縣) 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39세가 된 고종 소흥 14년(1144년) 과거에 진사로 급제하였고, 이후 대리사직, 기거랑, 한림학사, 추밀원 편수관을 지냈다. 고종때 진회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던 [[악비]]의 신원 확인 및 회복을 주장하였고 효종이 그말에 찬성하며 우승상에 승진하게 되었다. [[금나라]]의 [[해릉양왕]]이 남송을 침공할 당시 태자였던 효종이, 사호와 논의 1도 없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막겠다고 건의하다 고종의 역린을 건들게 되자, 효종에게 조언 및 간언을 해준 일화도 있다. 앞서 올린 태자 자신의 건의가 성급함으로 고종의 심기를 거스른 것을 사죄하면서, 태자의 단독 출정 대신 고종과 효종이 함께 출정하는 내용으로 변경하도록 조언하였다. 효종은 해릉양왕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고종의 후임으로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며, 10여년 뒤 사호 자신도 재상으로 승진한다. 임기는 1년에 불과했다. 광종이 즉위한 뒤 사호는 태사(太師)로 진위되었고, [[1194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사호는 회계군왕(會稽郡王)으로 추봉되었고 [[영종(남송)|영종]]이 즉위한 뒤에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1221년]]에는 작위가 월왕(越王)이 되었고 충정(忠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가족관계 == 사호는 4명의 아들로 사미대(史彌大), 사미정(史彌正), [[사미원]], 사미견(史彌堅)이 있었다. [[영종(남송)|영종]], [[이종(송)|이종]] 재위기에 재상을 지냈던 사미원이 바로 사호의 [[3남|아들]]이었다. [[분류:1106년 출생]][[분류:1194년 사망]][[분류:송나라/인물]][[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닝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