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1485877141_0_185ec4_68d23d8f_xxxl.jpg|width=300]] || [[파일:Sakhalin_Ainu_Man.jpg|width=300]] || 위 사진 촬영자는 [[https://en.m.wikipedia.org/wiki/Bronis%C5%82aw_Pi%C5%82sudski|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형이다.] * [[일본어]]: 樺太アイヌ (카라후토 아이누) * [[러시아어]]: Сахалинские айну (사할린스키예 아이누) * [[아이누어]]: repunmosir-un-kuru (레푼모시르-운-쿠루) * [[영어]]: Sakhalin Ainu (사할린 아이누) * [[중국어]]: 苦夷, 苦兀, 骨嵬 (고이, 고올, 골외) * [[여진어]]: Ku-i (쿠이) * [[만주어]]: Kuye (쿠예) [목차] [clearfix] == 개요 == 현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사할린]] 남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아이누족]]의 분파이다. 이들은 현악기 톤코리와 [[미라]] 제작으로 유명하며 [[홋카이도]]의 [[아이누]]나 [[쿠릴 아이누]]와는 문화가 달랐다고 한다. [[아이누|홋카이도 아이누]]들은 사할린 섬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레푼모시르 운 쿠루'''로 부르며 하나의 카테고리로 인식했다. 인접한 [[니브흐]] 등 [[퉁구스]]계 민족들과의 혼혈 때문인지 홋카이도나 쿠릴 지역의 아이누에 비하면 동양적인 외모를 띄고 있는데, 풍성한 [[수염]]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인]]들과 비슷하다. 현재 사할린 아이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사할린 거주자는 대부분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사할린 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 역사 == === 근대 이전 === 아이누 문화가 형성된 13세기 이전에는 사할린, 홋카이도 동북부 지역, 쿠릴 열도에는 오호츠크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해양민[* 6세기에 이르러 아무르강 중하류의 말갈인들이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으로 진출했고, 그곳의 수주야(鈴谷) 문화과 융합하여 오호츠크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후 아이누의 확장으로 쿠릴 열도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까지 도달했다. 오호츠크 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인골은 [[니브흐]], [[울치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사쓰몬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은 13세기 무렵 교역을 통해 [[혼슈]]의 철제 문화와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하여 아이누 문화를 형성했고, 이들은 교역품인 [[바다사자]]나 [[해달]]의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북쪽과 사할린에 살던 원주민들을 복속하거나 축출하는 과정에서 사할린 남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거주하던 [[니브흐|니브흐인]][* 아이누는 이들을 '''스메렌 쿠르'''라고 불렀다.]들과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니브흐인들은 [[몽골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 지역의 토산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몽골 황실은 이 지역의 사할린을 공격하여 만호부를 설치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1287년 동진골외국(東眞骨嵬國) 만호(萬戶) 테무르가 만군(蠻軍)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키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면서 고려를 방문했다고 한다.] 몽골의 아이누 정복은 아이누 군장 공동체들의 단결과 종족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 [[파일:Kuye.jpg|width=300]] ||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 3권, 쿠예(Kuye, 庫野) 남녀.|| 이후 [[청나라|청대]]에 사할린은 명목상 [[길림]]에 속해 있었는데, 당시 청은 사할린 아이누인들은 '쿠예'라고 불렀다. 사할린 아이누들은 청나라와 아무르강 유역의 소수민족들, 일본 사이에 껴서 교역으로 먹고 살다가 이후 '''19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 근대 이후 === || [[파일:V.M._Doroshevich-Sakhalin._Part_II._Group_of_Ainu_People.png|width=80%]] || || 블라스 도로쉐비치(Влас Дороше́вич)의 «사할린(카트로가)» 151쪽 사진. ||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사할린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이 시작되었다. 1875년의 교환 조약으로 사할린은 일단 러시아에 넘어가고 일본 정부가 파견한 홋카이도 개척사의 주도하에 사할린 아이누 총 2,300여 명 중 800여 명이 홋카이도 북부의 [[소야 종합진흥국|소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876년 개척사의 [[에베츠시|에베츠]] 재이주 방침에 개척사와 사할린 아이누 사이에 마찰을 겪기도 했다. 설상가상 1879년에 유행한 [[콜레라]]로 다수의 인명 손실을 냈다. 1905년 러일전쟁 강화조약으로 [[가라후토청|사할린 남부가 일본에 양도되어]] 홋카이도에 이주해있던 사할린 아이누 대다수가 귀향을 선택했는데, 339명이 다시 옛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잔류자는 12명, 행방불명자는 15명으로 인구의 손실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40년 뒤인 1945년 [[남사할린 침공]]으로 [[소련]]이 전(全) 사할린을 재점령해 다수의 사할린 아이누가 홋카이도로 재이주하였다.[* 당시 사할린에 살던 아이누의 수는 약 1,159명이었으며, 소련이 100명만 남겨두고 다 쫓아냈다. 남은 이들도 노인들만이 순혈 아이누족이었고, 나머지 연령대의 아이누들은 혼혈이거나 러시아인들과 결혼한 상태였다. [[니브흐]], [[윌타]] 등 북사할린 원주민들은 과거부터 러시아의 영향력을 짙게 받았고 대다수가 소련 국적이었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면 추방당하지 않고 잔류한 반면 사할린 아이누들은 일본의 영향권이던 남사할린의 원주민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처우를 받았다.] == 언어 == 언어는 [[아이누어]] 방언에 속하는 사할린 아이누어를 썼다고 한다. 현재 구사하는 이는 없지만[* 과거 홋카이도 [[히다카 진흥국]] 사루 군에 살던 다흐코난나(Tahkonanna), [[창씨개명|창씨명]] 아사이 타케(浅井タケ)라는 사할린 아이누 여성이 구사하였으나 그녀가 사망 이후 사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전에 언어 및 전승 문학 기록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한다.], 쿠릴 방언과 다르게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자료가 남아 있기는 하다. == 실존인물 == * [[https://ja.m.wikipedia.org/wiki/%E5%B1%B1%E8%BE%BA%E5%AE%89%E4%B9%8B%E5%8A%A9|야요마네쿠흐/야요마네구흐(Yayomanekuh)]] - 사할린 아이누 지도자. [[창씨개명|일본식 성명]]은 '야마베 야스노스케'. * [[https://ja.m.wikipedia.org/wiki/%E6%B5%85%E4%BA%95%E3%82%BF%E3%82%B1|다흐코난나(Tahkonanna)]] - 마지막으로 생존 중이던 사할린 아이누어 구사자로 1994년에 사망하였다. [[창씨개명|일본식 성명]]은 '아사이 타케'. == 창작물에서 == * [[골든 카무이]] - [[에노노카]], [[키로란케]][*스포일러 [[타타르인]]과의 혼혈.], [[달걀귀신(골든 카무이)|우이루쿠]][* [[폴란드인]]과의 혼혈] == 기타 == [[1923년]] [[홋카이도대학]] [[조교수]]가 [[https://m.blog.naver.com/chookon/120019133436|사할린 아이누 코탄에 있었던 일들을 적은 내용이 있다.]][* 모바일로 보는 이들은 데스크톱 모드 설정 뒤 관람할 것.] [[분류:아이누]][[분류:러시아의 민족]][[분류:사할린주]][[분류:일본의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