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사학 12도(私學十二徒), 십이공도(十二公徒)는 [[고려시대]]의 [[사립학교|사학]]으로 [[고려 문종]] 시기부터 [[공양왕]] 재위기인 1391년 6월까지 존속했다. == 특징 == 고려시대의 [[과거 제도]]는 [[국학]]([[국자감]], [[성균관]], 학당[* 고려 말, 지방의 향교에 대응하는 중앙 교육기관.], [[향교]])의 학생이 아니더라도 응시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과거 제도의 관례로 좌주(座主, 스승이자 시험관)와 문생(文生, 학생이자 과거 응시자)의 관계가 밀접했던 점은 사학의 유지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문벌귀족]]들은 사학을 적극 이용해 스승인 시험관이 뽑아주는 것으로 중앙 관직에 나아갔으며 그들 자신이 또 시험관이 돼 다른 문벌귀족들을 중앙으로 진출시켰다. 합격자들은 부모가 살아있더라도 반드시 좌주를 먼저 찾아뵙는 것이 예법이었으며 사학은 [[청탁]]이 오가거나[* 청탁의 일례로, 좌주 [[김부식]]이 권력을 잡은 뒤 문생 대부분이 높은 관직에 오른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했던 문생 [[오인정]]이 한미한 관직에서 머무르니, 김부식은 [[탐라]]의 지방관직을 주고 문생을 제주도로 보낸다.] 당파를 이루게 되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고려 중기 국학의 필요에 의문을 가지며 국고의 낭비만 가져오는 국자감을 폐지하자는 재상 [[소태보]]의 상소로 국학과 사학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숙종(고려)|숙종]]같이 왕권 강화에 힘쓴 왕들은 국학을 적극 밀어줬으며 이후 [[무신정권]]의 득세로 주춤했지만 고려 후기에도 사학과 연관된 관례는 마찬가지로 유지됐다. [[공민왕]] 시기 진사 [[이색(고려)|이색]]은 국학의 생도가 아니면 과거 응시 기회를 주지 말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고려사』 권74, 선거 2, 학교.] 이색은 성인을 만들기 위한 유학이 벼슬하기 위한 학문으로 변질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12도를 나온 학생들 모두 다시 성균관을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바꿀 것을 건의했다.[* 『고려사』 권115, 이색 열전.] [[성리학]] 이념과 맞지 않다고 여겨진 사학은 [[신진 사대부]]들이 권력을 잡은 뒤 전면 폐지된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원]]이 하나둘씩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교육사에서는 사학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인다. == 목록 == || 명칭 || 창립자 || 상세 || || [[문헌공도]][br](文憲公徒) || 시중 [[최충]] ||사학의 근본으로 고려시대 사학은 최충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중최공도'라고도 부른다. 가장 번성한 사학으로 아래 9재(九齋)의 학당이 있었으며 대부분 과거 응시자들이 9재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 || 홍문공도[br](弘文公徒) || 시중 [[정배걸]] ||'웅천도(熊川徒)'라고도 부른다. 창립자 정배걸은 현종 시기 장원 급제했다. [[무신정권]] 시기 급제자 임득후가 홍문공도의 선성당(宣聖堂)을 [[김준(고려)|김준]]에게 팔아버린다. 학생들이 [[최충헌]]에게 이를 고발하니 임득후는 투옥된다. 12공도 중 학문의 수준이 가장 떨어졌다고.[* 그래서 '웅천(熊川)'은 마음이 들뜨고 허황된 사람을 놀리는 말이 됐다.] || || 광헌공도[br](匡憲公徒) || 참지정사 [[노단(고려)|노단]] || || || 남산도[br](南山徒) || 좨주 [[김상빈(고려)|김상빈]] ||좨주는 대사성 바로 아래 관직이니 국학의 고위 관료 출신이 세운 사학이 된다. [[권정평]]이 남산도 강신재(講信齋)에서 수학한 뒤 합격했으며, 그 묘지명을 지은 오세공도 같은 재의 [[후배|후생]]이다. || || 서원도[br](西園徒) || 복야 [[김무체]] ||창립자 김무체는 최충의 문생으로 장원 급제했다. || || 문충공도[br](文忠公徒) || 시중 은정 || || || 양신공도[br](良愼公徒) || 평장사 [[김의진(고려)|김의진]][* 또는 낭중 박명보.] || || || 정경공도[br](貞敬公徒) || 평장사 황영 || || || 충평공도[br](忠平公徒) || 유감 || || || 정헌공도[br](貞憲公徒) || 시중 [[문정]] ||창립자 문정은 문종 초에 과거에 급제한다. || || 서시랑도[br](徐侍郞徒) || 서석 || || || 구산도[br](龜山徒) || (불명)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경 대화북문 인근에 구산사(龜山寺)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 근처에 위치한 사학이었을 것이다. || 대부분 사학이 창립자의 시호에서 유래한 이름이 붙었으며, 그 외 남산(南山), 서원(西園), 구산(龜山) 등은 사학이 위치한 개경 인근의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분류:고려]][[분류:교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