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1 謝述 | 사술}}}''' || || '''성''' ||사(謝) || || '''이름''' ||술(述) || || '''자''' ||경선(景先) || || '''생몰''' ||390년 ~ 435년 || || '''부친''' ||사윤(謝允) || || '''조부''' ||사거(謝據) || || '''출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자는 경선(景先)이다. == 생애 ==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 출신으로, 동진의 명재상 [[사안(동진)|사안]]의 형인 사거(謝據)의 손자이며, 사윤(謝允)의 아들로 [[사유(동진)|사유]]의 동생이다. 사술은 형인 사순(謝純)을 따라 강릉에 있었으나, 사순이 살해되자 사순의 관을 지키며 수도인 건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서새(西塞)에 이르러 폭풍을 만나 사순의 관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버리자 사술은 작은 배를 타고 사순의 관을 찾으려고 했다. 사순의 아내 유씨는 반대했지만 사술은 기어이 사순의 관을 찾아냈다. 유유는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곧바로 중정을 시켜 사술을 주부로 삼고 매우 중시하였다. 사술은 뒤에 태위 참군이 되었고 사마휴지를 토벌할 때 종군하여 길양현오등후(吉陽縣五等侯)로 책봉되었다. 또한 유의부의 밑에서 참군이 되었다가 주부로 전임되었으며, 송대에서 상서사부랑을 역임했다가 유의부의 밑에서 다시 주부를 맡았다. 유송이 건국된 뒤 태자중사인으로 전임되었고 장사군 내사로 선출되었다. 425년, 중서시랑으로 임명되었다. 426년, 무릉군 태수, 표기장군 팽성왕 유의강의 장사로 전출되었고 남군 태수를 겸하였다. 당시 사촌형인 사요가 유의강의 장사로 있었으나 사술이 사요를 대신하여 유의강의 장사가 되었다. 유의강이 사도가 되자, 사술은 좌장사가 되었고 유의강의 후대를 받았다. 또한 은경인과 유담이 사술과 교류를 맺었다. 사술은 오군 태수로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않았다. 병이 차도를 보이자 오흥군 태수로 부임했으며, 435년에 사망했다. 은경인과 유담은 사술의 관을 보고 사술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440년 유담이 처형된 뒤 유의강은 사술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이 죄를 얻지 않았을 것이라 한탄했으며, [[문제(유송)|문제]] 유의륭 또한 사술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 기타 == 사술의 큰형인 사유는 동생인 사함(謝甝)을 총애했으나 사술을 미워했다. 한번은 유유를 잔치에 초대할 때 사유는 사함을 동석하게 했지만 유유는 사술을 찾았다. 사술은 사유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잔치에 가지 않았으나 유유의 설득으로 결국 잔치에 참여했다. 사술은 사유가 병에 걸리자 사유의 간호에 힘썼고 탕약과 음식을 자신이 맛본 뒤에 사유에게 올렸다. 사술의 진심어린 간호에 사유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390년 출생]][[분류:435년 사망]][[분류:진군 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