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서진의 황족, rd1=사마유, other2=서진의 시평왕, rd2=사마유(시평왕), other3=후한의 인물, rd3=사마유(창무정후))] [include(틀:진서)] [include(틀:서진의 계보도)] ||<-2> '''{{{+1 司馬蕤[br]사마유}}}''' || || '''작위''' ||요동왕(遼東王) → 동래왕(東萊王) → 미양후(微陽侯)[br] → 동래왕(東萊王) || || '''성''' ||사마(司馬) || || '''이름''' ||유(蕤) || || '''자''' ||경회(景回) || || '''부친''' ||친부: 제헌왕(齊獻王) [[사마유]][br]양부: 요동도혜왕(遼東悼惠王) [[사마정국]] || || '''생몰''' ||? ~ 30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서진]]의 황족인 제왕 [[사마유]]의 아들이며 자는 경회(景回)로 작위는 동래왕(東萊王). == 생애 == 처음에는 요동왕 [[사마정국]]의 양자였다가 277년 9월에 요동왕에 책봉되었다가 283년에 동래왕으로 옮겼다. 사마유는 원강 연간에 보병도위와 둔기도위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성품이 난폭하였고 술김에 아우인 제왕 [[사마경]]을 능멸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왕 [[사마륜]]이 정권을 농단하는 것을 보다못한 사마경은 군대를 일으키자, 여기에 분노한 사마륜이 사마유와 아우인 북해왕(北海王) 사마식(司馬寔)을 유폐시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중서자인 조납이 상소를 올려 간언하면서 사마유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손수(서진)|손수]]가 죽자, 사마유는 겨우 풀려났다. 사마유가 풀려나고 사마경이 사마유를 맞이하였는데, 사마경은 사마유를 거들떠보지 않아 사마유가 이를 원망하였다. 이후 사마경이 정사를 보좌하면서 사마유를 산기상시, 시중, 특진으로 삼고 사마경의 요구에 따라 부를 열었다. 하지만 오히려 사마경은 오왕과 예장왕이 부를 아직 열지 않았으니 그 두 사람이 부를 연 다음에 부를 열라고 말하여, 사마유는 사마경을 더욱 원망하게 되었다. 사마유는 사마경이 전권을 틀어쥐고 있다며 좌위장군(左衛將軍) 왕여(王輿)와 함께 사마경을 폐할 것을 모의하였지만 사전에 일이 발각되어 결국 폐서인되었다. 사마유는 뒤에 미양후(微陽侯)로 책봉되었지만, 상용 내사 진종(陳鍾)이 사마경의 밀서를 받고 사마유를 살해하였다. 사마유가 죽고 1년 뒤에 사마경이 죽었으며, 조정에서는 사마유를 살해한 진종을 주벌하였고, 사마유의 작위를 추복하여 왕의 예로 장례를 다시 지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사마유(동명이인), version=11, paragraph=3)] [[분류:서진의 황족]][[분류:301년 사망]][[분류:하내 사마씨]][[분류: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