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프린세스 로열)] [include(틀:역대 독일 황후)] ||<-3> ''' 프린세스 로열[br]독일 제국 프리드리히 3세의 황후[br]{{{+1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br]Victoria, Princess Royal '''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74578552185.jpg|width=100%]]}}} || ||<|2> '''이름''' || 영어 ||빅토리아 애들레이드 메리 루이자[br](Victoria Adelaide Mary Louisa) || || 독일어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마리아 루이제[br](Viktoria Adelheid Maria Luise)|| || '''출생''' ||<-2>[[1840년]] [[11월 21일]][br][[영국]] [[런던]] [[버킹엄 궁전]]|| || '''사망''' ||<-2>[[1901년]] [[8월 5일]] (향년 60세)[br][[독일 제국|독일국]] [[헤센 대공국]] 프리드리히쇼프 성|| || '''장례식''' ||<-2>[[1901년]] [[8월 13일]][br][[독일 제국|독일국]] [[포츠담]] 평화 교회|| || '''배우자''' ||<-2>[[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1858년 결혼 / 1888년 사망),,|| || '''자녀''' ||<-2>[[빌헬름 2세]],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하인리히]], 지기스문트, [[프리데리케 아말리아 빌헬미네 빅토리아|빅토리아]], 발데마르,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조피]], [[마르가레테 폰 프로이센|마르가레테]]|| || '''아버지''' ||<-2>[[앨버트 공|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 '''어머니''' ||<-2>[[빅토리아 여왕]]|| || '''형제''' ||<-2>[[에드워드 7세]], [[앨리스 모드 메리|앨리스]], [[알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알프레드]], [[헬레나 어거스타 빅토리아|헬레나]], [[루이즈 캐롤라인 앨버타|루이즈]], [[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아서]], [[레오폴드 조지 덩컨 앨버트|레오폴드]],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베아트리스]]|| || '''종교''' ||<-2>[[성공회]] {{{-2 ([[잉글랜드 국교회]],[[신명]]:[[빅토리아]])}}}|| || '''서명''' ||<-2>[[파일: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서명.pn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장녀]]이자 맏이.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누나. [[프로이센 왕국]]의 [[왕비]],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영국/역사|영국 역사]]상 4번째 [[프린세스 로열]]이다. [[빌헬름 2세]],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그리스의 소피아 왕비]]의 어머니이자 영국의 국왕 [[조지 5세]], [[모드 샬럿 메리 빅토리아|노르웨이의 모드 왕비]],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루마니아의 마리 왕비]]의 큰고모이다. 애칭은 비키.(vicky) == 작위 == || [[파일:Coat_of_Arms_of_Victoria,_the_Princess_Royal.svg.png|width=250]] || || 문장 || * 빅토리아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Victoria ([[1840년]] [[11월 21일]] ~ [[1841년]] [[11월 10일]]) * 프린세스 로열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Royal ([[1841년]] [[11월 10일]] ~ [[1858년]] [[1월 25일]])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Frederick William of Prussia ([[1858년]] [[1월 25일]] ~ [[1861년]] [[1월 2일]]) *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Prussia([[1861년]] [[1월 2일]] ~ [[1871년]] [[1월 18일]]) * 독일의 황태자비, 프로이센의 왕세자비 전하 Her Imperial and Royal Highness The German Crown Princess, Crown Princess of Prussia ([[1871년]] [[1월 18일]] ~ [[1888년]] [[3월 9일]]) * 독일의 황후, 프로이센의 왕비 폐하 Her Imperial and Royal Majesty The German Empress, Queen of Prussia ([[1888년]] [[3월 9일]] ~ [[1888년]] [[7월 15일]]) * 프리드리히 황태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Frederick ([[1888년]] [[7월 15일]] ~ [[1901년]] [[8월 5일]]) == 생애 == === 대영제국의 첫째 공주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280px-Victoria,_Princess_Royal,_1842.jpg|width=100%]]}}} || || 1842년 2세 때의 빅토리아 공주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674579052675.jpg|width=100%]]}}} || || 1855년 14세 때의 빅토리아 공주[* 아들인 빌헬름 2세의 어린시절과 닮았다. 조카 앨버트 빅터의 얼굴도 살짝 보인다.] || 빅토리아는 1840년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기대한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맏이]]인 빅토리아 공주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으나, 이내 빅토리아 공주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형제들 중 가장 총명했고, 당대의 지성인 중 하나였으며, 특히 아버지의 사상을 물려받아 [[자유주의]]를 지지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부부는 빅토리아 공주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아쉬워했다고 한다. 여성의 승계권은 인정하지만 같은 부 또는 모 슬하의 친형제자매끼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당시 [[영국]] [[왕위 계승의 법칙]]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이자 장남인 남동생 [[에드워드 7세]]가 누나 빅토리아 공주를 제치고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남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 공작]]의 무남독녀이며, 켄트 공작의 손위 형제들(장남 [[조지 4세]], 차남 프레데릭, 3남 [[윌리엄 4세]]) 중 후사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빅토리아 여왕보다 계승권이 앞서는 사촌언니 샬럿이 있었으나 출산 중에 아기와 같이 죽어서 빅토리아 여왕 앞에 선순위 후계자가 없었다. ][* 2015년 이후 [[영국 왕실]]에서는 남녀 구별 없이 출생 순서에 따라 왕위 계승 순서가 정해진다. 바뀐 제도의 혜택을 처음으로 받게 되는 [[공주]]는,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윌리엄 왕세자]]와 [[캐서린 미들턴|캐서린 왕세자비]]의 장녀이자 둘째인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샬럿 공주]]이다.][* 남동생 [[에드워드 7세]]의 존재 때문에 본인이 어머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여왕이 되지 못하고 독일 제국의 황후로만 남아야 했기에 훗날 아들 빌헬름 2세에게 학대에 가까운 엄격한 훈육을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많다.] === 결혼과 육아 === [[빅토리아 여왕]]은 딸을 항상 곁에 두고 외국에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외교 관계를 고려한 [[앨버트 공]]의 의향으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혼약이 체결되었다. 1858년 [[1월 25일]], 빅토리아 공주는 [[빌헬름 1세|빌헬름 왕태제]]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했다.[* 당시에는 백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살아있었고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왕태제였다. 즉 왕위 계승 2순위이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빅토리아 여왕네와 프리츠.jpg|width=100%]]}}} || 1855년 약혼 당시 사진. 왼쪽에 서있는 남자가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츠 왕자]],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 오른쪽에 서있는 남자가 아버지 [[앨버트 공]],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빅토리아 공주 본인이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프리츠와 비키의 결혼식 포스터.jpg|width=100%]]}}} || || 결혼 당시 포스터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he_Marriage_of_Victoria,_Princess_Royal,_25_January_1858.jpg|width=100%]]}}} || 프로이센 왕실에서는 두 사람이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워낙 아꼈던 딸인데다 [[빅토리아 여왕]]의 독단적인 고집까지 맞물려, 프로이센 왕실의 주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직접 프로이센 대사를 불러 "[[영국]] 이외의 장소에서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해, 결국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훗날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앨리스 공주]]도 아버지 [[앨버트 공]]의 뜻으로 [[독일]] [[헤센 대공국]]의 [[루트비히 4세(헤센)|루트비히 4세]]에게 시집갔다. 그 이후로 빅토리아 여왕은 더 이상 딸들을 외국에 시집보내지 않으려 했고, 3녀 [[헬레나 어거스타 빅토리아|헬레나 공주]], 4녀 [[루이즈 캐롤라인 앨버타|루이즈 공주]], 5녀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베아트리스 공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한 후에도 [[영국]]에서 거주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848494-1544435372.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95131-1340800216.jpg|width=100%]]}}} || || 1862년의 가족사진.[* 왼쪽의 아이는 [[빌헬름 2세]], 오른쪽의 아이는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 공주]]이다.] || 1874년의 가족사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프리드리히 3세와 비키.jpg|width=100%]]}}} || 부부간에 금슬은 매우 좋았고, 4남 4녀를 낳았다.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또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자였기에, 결혼 생활은 행복한 편이었다. 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맏이가 훗날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빌헬름 2세]]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프리츠, 비키 부부 결혼기념 25주년 포스터.jpg|width=100%]]}}} || || 결혼 25주년 기념 포스터 || === 가정 내의 불화 ===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부장적인 프로이센에서 똑똑한 자유주의자인 빅토리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특히 독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했다고. 거기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아우구스타 황후]]는 총명한 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급기야 빅토리아가 본인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타의 장손인 [[빌헬름 2세]]를 장애가 있는 왼쪽 팔을 치료한답시고 학대하다시피 하자 보다 못해서, 손자를 며느리에게서 데려와 자신이 직접 양육했고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빌헬름 2세는 부모의 성향과는 반대되는 [[군국주의자]]가 되었다. 사실 가정 내 불화의 원인은 빅토리아와 프리드리히 부부가 부모로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파일:비키와 빌리.jpg]] 빅토리아 황태자비와 장남 [[빌헬름 2세]]. 이런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당대에도 유명했다. 아들인 빌헬름 2세는 어머니를 반쯤 [[영국]]의 스파이로 여겼다. 심지어 간혹 '어머니' 혹은 '모후' 라는 호칭 대신 '그 (영국) 여자'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 왕실의 일원들과 가족 서신이라는 명분 하에 주고 받은 반역적인 편지와 서류들을 찾아내겠다며 어머니의 처소를 폐쇄해 버리고 개인 서신까지 전부 검열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이다. 다만 [[빌헬름 2세]]와 빅토리아 모자의 불화는 빌헬름이 패륜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가 자초한 것이 매우 컸다. 빅토리아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던 스파르타식 육아법을 그대로 따랐는데, 빅토리아 왕세자비 본인이야 매우 명석하고 성실했기에 어머니의 교육을 잘 따라갈 수 있었지만[* 그에 비해 동생 에드워드 7세는 완전히 엇나간 걸 보면 빅토리아 여왕의 육아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알수 있다. 혈혈단신의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할 당시 막내외삼촌 [[레오폴드 1세]] 같은 정치적인 멘토는 있어도 가정적인 멘토가 될 만한 어른은 딱히 없었기 때문. ] 그녀의 자녀들에게는 아니었다. 빌헬름 2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팔이 짧은 장애가 있었는데 빅토리아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고, 몸이 불편한 아들을 보듬어주기보다는 냉대하며 학대에 가까운 치료들을 끊임없이 행했다. 빌헬름이 8살 때 빅토리아는 왕위 계승자로서 빌헬름이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불편한 아들에게 승마를 강제로 배우게 시켰고 당연히 빌헬름은 승마를 하는데 힘들어했다. 몇 번이고 떨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제자리에 앉았고, 몇 주 뒤에 겨우 승마를 그럭저럭 잘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연히 어린 빌헬름 2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고, 계속되는 어머니의 냉대에 성격이 비뚤어졌다. 이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훗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에게 '''"제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비슷하게 어머니의 무관심과 불행한 가정환경에 둘러싸여 고통받았던 동시대의 인물인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오스트리아의 루돌프 황태자]]처럼 안 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빅토리아의 비정함은 장남 빌헬름 2세 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인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샤를로테 공주]]와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하인리히 왕자]]와도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들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이는 빅토리아와 갈등을 빚는 시부모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가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의 자녀들 중 빌헬름 2세, 샤를로테, 하인리히를 예뻐하고 나머지 손녀들은 냉대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게다가 아내와 자식들 간의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3세가 오래 살았어도 독일 제국은 원 역사 그대로 망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당장 1848년 혁명이 가장 활발했던 것도 독일이고 마르크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한 곳도 독일이었다. ] 역시 아버지로서 막장이었는데, [[공처가]]라서 무책임하게 아내의 편만 들면서 갈등의 봉합은커녕 자식들의 상처만 더욱 커지게 했다. 결국 "아버지가 나약해서 어머니에게 휘둘린다"는 빌헬름 2세의 의심은 완전한 망상만은 아니었던 셈. 또한 [[대영제국]]의 [[프린세스 로열]] 이라는 높은 신분과 친정의 위세 역시 빅토리아의 프로이센 궁정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일부 프로이센 귀족들은 '[[영국]]이 빅토리아를 통해 내정간섭을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앞서 언급된 비스마르크는 물론이고 아들인 [[빌헬름 2세]]마저 공유했던 의견이였다. 실제로 빅토리아는 정치적으로는 시아버지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의 견제에 밀려 딱히 정치적으로는 친영적 행보를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녀들을 키울 때는 철저하게 [[영국인]] [[가정교사]]의 손을 빌려 [[영국]]식 교육법을 고수하고, [[주치의]]를 선별할 때도 [[독일인]] [[의사]]들을 제치고 영국인 의사들을 최우선적으로 신임하는 등, '''일상적인 궁정습관이나 가정생활에서는 철저히 친영국적이었다.''' 그나마 [[영국]]풍을 선호했던 남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는 아내의 이런 습관들을 나쁘지 않게 여겼지만 이런 모습을 독일 국민들 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가 만무했고, 이런 탓에 빅토리아는 평생 '''영국 여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빅토리아는 [[독일]] 궁정에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왕위계승자였던 시아버지 [[빌헬름 1세]]가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고 남편 프리드리히 왕자도 정식으로 왕세자가 되어 신분이 완전히 바뀐 뒤에도 연금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드리히와 빅토리아 부부가 연유를 묻자 "전하께는 부자인 왕세자비께서 계시니까 연금을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다고.(…) 이는 아들 부부가 자신과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던 [[빌헬름 1세]]가 안 그래도 부유한 그들에게 연금까지 올려주면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에 반하는 정치 세력을 거느리게 될 것을 염려한 노골적인 견제였지만, 빅토리아의 신분과 재력이 [[독일]] 정계에서 어느 정도로 위협적이었는지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때문에 빅토리아 왕세자비는 왕세자의 체통에 맞는 궁정을 운영할 경비가 부족해서 [[지참금]]과 개인 재산을 써야 했고, [[부부]] 동반이 당연한 공무 여행에서마저 공금이 안 나와서 제대로 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 말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독일 2대 황제 부부와 황태자 부부.jpg|width=100%]]}}} || 1888년 [[3월 9일]], 시아버지 [[빌헬름 1세]] 사후 남편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황후]]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전부터 심각한 [[후두암]]에 걸려 있어서, 빅토리아 황후가 남편 대신 온갖 정무를 처리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의 후두암 치료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 의료진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영국인 의사 멕켄지 박사가 "후두암이 아니다"고 진단을 내리는 바람에[* 병리학의 아버지라는 [[루돌프 피르호]]의 조직검사에 근거하기는 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치료 시점을 놓쳐 제대로 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즉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1888년은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로 불리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의 오진과 사망 또한 빅토리아의 평판을 더더욱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고 아들 [[빌헬름 2세]]는 이 일로 인해 두고두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영국 의사가 내 아버지를 죽였고 영국 의사가 내 팔을 불구로 만들었다. 이는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 >'''[[빌헬름 2세]]'''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336916-1351854992.jpg|width=100%]]}}} || || 말년의 빅토리아 황태후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빌헬름 2세의 가족사진.jpg|width=100%]]}}} || 빌헬름 2세의 즉위 이후 찍은 가족 사진. 모자간의 거리감과 불편함이 너무 대놓고 잘 드러나 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빅토리아 황태후와 빌헬름 2세.jpg|width=100%]]}}} || || 빌헬름 2세와 함께[* 시부모와 아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받아서인지 60세에 죽었음에도 엄청 늙어 보인다. 물론 상술하듯 빅토리아의 책임도 매우 크다. 유방암 발병원인 중 스트레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크다.] || 장남 [[빌헬름 2세]]의 즉위하면서 황태후가 되었으며, 2년뒤 시어머니 아우구스타 태황태후가 사망하면서 황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빌헬름 2세가 황제가 된 이후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유방암]]에 걸려 [[1901년]] [[8월 5일]][*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약 7개월 뒤였다.]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일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해서, [[유언]]으로 자신의 관을 [[유니언 잭]]으로 감싸서 매장해 달라고 했다. 물론 유언대로 해줬지만 독일 국민들이 보기에는 뭐..... 개인적으로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고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도 강했지만 어머니로서는 결국 0점짜리 어머니였고 한평생 아들과 적대관계가 되고 말았다. == [[호엔촐레른 가문|가족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호엔촐레른 가문)] === 조상 ===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13>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br]{{{-2 (Victoria,[br]Princess Royal)}}} ||<|6>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공|앨버트]][br]{{{-2 (Prince Albert[br]of Saxe-Coburg and Gotha)}}} ||<|3> [[에른스트 1세|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br]{{{-2 (Ernest I,[br]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 [[프란츠 폰 작센코부르크잘펠트|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br]{{{-2 (Francis Frederick,[br]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로이스-에보스도르프 여백작[br]아우구스타 카롤리나[br]{{{-2 (Countess Augusta Carolina[br]of Reuss-Ebersdorf)}}} || ||<|3>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즈[br]{{{-2 (Princess Louise[br]of Saxe-Gotha-Altenburg)}}}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투스[br]{{{-2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여공작[br]루이즈 샤를로트[br]{{{-2 (Duchess Louise Charlotte[br]of Mecklenburg-Schwerin)}}} || ||<|7> [[빅토리아 여왕]][br]{{{-2 (Victoria)}}} || ||<|3> [[에드워드 어거스터스|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br]{{{-2 (Prince Edward,[br]Duke of Kent and Strathearn)}}} || || [[조지 3세]][br]{{{-2 (George III)}}} || || [[조피 샤를로테|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br]{{{-2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 ||<|3>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br]{{{-2 (Princess Victoria[br]of Saxe-Coburg and Saalfeld)}}}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br]프란츠 프리드리히[br]{{{-2 (Francis Frederick,[br]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 || 로이스-에보스도르프 여백작[br]아우구스타 카롤리나[br]{{{-2 (Countess Augusta Carolina[br]of Reuss-Ebersdorf)}}} ||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2> '''1남''' ||<|2> [[빌헬름 2세]][br]{{{-2 (Wilhelm II)}}} ||<|2> [[1859년]] [[1월 27일]] ||<|2> [[1941년]] [[6월 4일]] ||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br]슬하 6남 1녀[* [[빌헬름 폰 프로이센|독일의 황태자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아이텔 프리드리히 왕자]],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아달베르트 왕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 [[오스카 폰 프로이센|오스카 왕자]], [[요아힘 폰 프로이센|요아힘 왕자]],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 || || 그라이츠의 헤르미네 로이츠 공녀 || || '''1녀''' || [[빅토리아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샤를로테|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br]{{{-2 (Charlotte, Duchess of Saxe-Meiningen)}}} || [[1860년]] [[7월 24일]] || [[1919년]] [[10월 1일]] || [[베른하르트 3세|작센마이닝겐 공작 베른하르트 3세]][br]슬하 1녀 || || '''2남'''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하인리히 왕자]][br]{{{-2 (Prince Heinrich)}}} || [[1862년]] [[8월 14일]] || [[1929년]] [[4월 20일]] || [[이레네 루이제 마리아 안나|헤센의 이레네 공녀]][*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다. 하인리히와는 이종사촌지간이다.][br]슬하 3남 || || '''3남''' || 지기스문트 왕자[br]{{{-2 (Prince Sigismund)}}} || [[1864년]] [[9월 15일]] || [[1866년]] [[6월 18일]] || || ||<|2> '''2녀''' ||<|2> [[프리데리케 아말리아 빌헬미네 빅토리아|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br]{{{-2 (Viktoria, Princess Adolf of Schaumburg-Lippe)}}} ||<|2> [[1866년]] [[4월 12일]] ||<|2> [[1929년]] [[11월 13일]] ||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 || || 알렉산더 줍코프 || || '''4남''' || 발데마르 왕자[br]{{{-2 (Prince Waldemar)}}} || [[1868년]] [[2월 10일]] || [[1879년]] [[3월 27일]] || || || '''3녀''' ||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그리스 왕국의 왕비 소피아]][br]{{{-2 (Sohpia, Queen of the Helenes)}}} || [[1870년]] [[6월 14일]] || [[1932년]] [[1월 13일]] || [[콘스탄티노스 1세]][br]슬하 3남 3녀[* [[요르요스 2세]], [[알렉산드로스(그리스)|알렉산드로스]],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루마니아의 왕대비 엘레니]], [[파블로스 1세|파블로스]] 등.] || || '''4녀''' || [[마르가레테 폰 프로이센|헤센 방백비 마르가레테]][br]{{{-2 (Margaret, Landgravine of Hesse)}}} || [[1872년]] [[4월 22일]] || [[1954년]] [[1월 22일]] || [[프리드리히 카를|헤센카셀 방백[br]프리드리히 카를]][br]슬하 6남 ||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s-1|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고. 여담으로 빅토리아의 자녀들인 빌헬름 2세와 그 형제자매들은 어머니보다 이모인 [[앨리스 모드 메리|앨리스 공주]]를 더 닮은 편이었다고 한다. == 여담 == *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 [[결혼 행진곡|혼례의 합창]]과 [[멘델스존]]의 관현악곡 [[한여름 밤의 꿈]] 중 [[축혼 행진곡|제 5막 알레그로 비바체 C장조]]를 본인의 결혼식에서 직접 선곡한 뒤로 21세기까지 결혼식 입장과 퇴장에 이 음악을 쓰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프로이센으로 시집간 후에도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수천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갈등 문서에서도 보다시피, 이 편지들로 인해 나중에 아들 [[빌헬름 2세]]의 주도로 반역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혐의로 몰리기도 했다. * 빅토리아 공주가 18세에 [[임신]]하자,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8E545F5-E156-4C29-B59F-948198DDE257.jpg|width=100%]]}}} || || 빅토리아 공주가 세례식 때 입었던 옷 || * 빅토리아 공주의 [[성공회]] 유아[[세례]]식 때 사용했던 세례복[* Christening gown.]과 세례반[* Lily Font. 세례식 때 이용하는 [[성수(종교)|성수]]를 담아놓은 큰 그릇.]은 현재까지도 [[영국 왕실]] 일원의 세례식 때 이용되고 있다. 세례반은 [[유지니 빅토리아 헬레나|유지니 공주]]를 제외한 모든 [[엘리자베스 2세]]의 자녀/손자녀들은 세례식 때 사용되였으며, 세례복 또한 2004년 [[루이즈 마운트배튼윈저]]의 세례식 때까지 사용되었고, 그 이후에는 복제품으로 대체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분류:독일 황후]][[분류:프로이센 왕비]][[분류:색스코버그고타 가문]][[분류:호엔촐레른 가문]][[분류:프린세스 로열]][[분류:1840년 출생]][[분류:1901년 사망]][[분류:웨스트민스터 출신 인물]][[분류:유방암으로 죽은 인물]][[분류:독일계 영국인]][[분류:영국계 독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