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백제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백제 제10대 어라하[br]{{{+1 분서왕 | 汾西王}}}'''}}} || ||<|2> '''출생[br]{{{-3 (음력)}}}''' ||연대 미상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2> '''사망[br]{{{-3 (음력)}}}''' ||[[304년]] [[10월]] || ||[[백제]] [[위례성]][br](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일대]])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제10대 어라하}}}''' || ||[[298년]] [[9월]] ~ [[304년]] [[10월]] {{{-2 (7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부여(扶餘) / 우(優)(?) || || '''휘''' ||분서(汾西) || || '''부모''' ||부왕 [[책계왕]][br]모후 보과부인[* 대방왕(帶方王)의 딸] || || '''왕후''' ||[[계왕|계]]의 모후 || || '''왕자''' ||[[계왕|계]] || || '''왕호''' ||'''분서왕(汾西王)''' ||}}}}}}}}} || [목차] [clearfix] == 개요 == [[백제]]의 제10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9대 [[책계왕]]의 장남. == 생애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儀表)가 뛰어나 아버지인 [[책계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한사군|한군현(漢郡縣)]] 세력의 침입을 막다가 책계왕이 전사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한 298년 10월 대규모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다잡았으며 299년 동명왕묘에 참배했다. 302년 4월 [[혜성]]이 대낮에 떨어지는 기상 이변이 있었다. 304년 2월 [[낙랑군]](樂浪郡)의 서쪽 현(西縣)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업적]]인데 이 사건이 분서왕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백제와 낙랑군 사이에는 [[대방군]](帶方郡)이 있었으므로 수군을 이용해서 [[중국]]과 이어지는 무역로의 거점을 점령하고 한군현을 통한 중계 [[무역]]이 아닌 중국 [[대륙]]과의 직접 무역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분서왕은 책계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등 한군현 세력에 대하여 강경책을 폈던 것으로 보이나 304년 2월의 낙랑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는지 304년 10월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비류왕]]이 분서왕을 [[암살]]하도록 낙랑군에 사주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알 수 없다. 일단 비류왕 즉위 기록을 보면 분서왕이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도 모두 어려서 비류왕이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써 있어서 더욱 비류왕 배후설에 설득력이 생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책계왕에 이어 분서왕까지 한군현의 세력에 [[살해]]당할 정도이니 그만큼 백제의 위용이 한군현에 크게 압박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황창랑]](黃昌郞)'''이라는 이름의 [[신라]] 출신 [[소년]]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창랑이 바로 《[[삼국사기]]》에 언급되는 낙랑군에서 보내 분서왕을 죽인 자객이라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황창랑이라는 인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조선]] 시대의 문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황창랑이라는 소년 검객이 백제 [[왕]]을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모양인데 어느 [[기록]]에서도 황창랑이 찔러 죽인 왕이 분서왕이라고 콕 찍어 명시하고 있지 않다. 애당초 백제 왕 중에 살해당했거나 정황상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왕들이 분서왕 말고도 너무 많아서 어느 시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하는 황창랑이 암살한 백제 왕이 누구라고 특정할 수 없다. >黃昌郞 不知何代人 諺相傳 八歲童子 爲新羅王 謀釋憾於百濟 往百濟市 以劍舞 市人觀者如堵墻 百濟王聞之 召入宮令舞 昌郞於座 揕殺之 >황창랑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8살 난 어린아이로서 신라 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잣거리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 >'''《속동문선》 권 제4, <칠언고시>''' ---- >도승지 남용익이 아뢰기를, >“[[봉림대군|효종대왕]]께서도 후원(後苑)에서 기예를 시험하셨는데, 그때에 이상진(李尙眞)이 '''백제(百濟) 황창랑(黃昌郞)의 검무(劍舞)의 일'''을 끌어대기까지 하면서 간쟁하였습니다.” >---- >'''《[[현종(조선)|현종]]개수실록》 현종 5년(1661년) 6월 11일'''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79&categoryId=49615&cid=49615|《삼국사기》 <분서왕 본기]]>''' 一年秋九月 분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죄수를 사면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다 五年夏四月 낮에 혜성이 나타나다 七年春二月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점령하다 七年冬十月 분서왕이 살해되다 == 기타 == * 확실한 것은 [[비류왕]]과 [[분서왕]]은 다른 지파라는 것. 분서왕은 [[고이왕]] 계열인 데 반해 비류왕은 [[초고왕]] 계열이라고 한다. 그런고로 고이왕계의 두 군주가 연속해서 [[피살]]당함으로써 고이왕 세력이 몰락하고, 초고왕 세력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류왕의 뒤를 이은 제12대 [[계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므로 고이왕계이지만, 결국 고이왕계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백제 왕실)] [[분류:백제 국왕]][[분류:304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한국사]][[분류:송파구 출신 인물]]